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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2세 [Ptolemaeos II Philadelphus, (Philadelphos는 그리스어로 '형제를 사랑하는'이라는 뜻) 기원전 308 코스~ 기원전 246]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2번째 왕(BC 285~246 재위)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 왕조 전성기의 왕으로, 이집트의 파라오 및 페르시아왕의 관습을 따라 누이 아르시에노와 결혼하며, 교묘한 외교로 세력을 확장하고, 농업과 상업을 발전시켰으며, 알렉산드리아를 예술과 과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교역에 종사하여 에게해를 중심으로 제국주의적 정책을 실시하였다. 막대한 관료와 군대를 양성하여 프톨레마이오스 2세시대에 그 부(富)는 세계 최고가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지만, 기원전 283~282년 단독 통치자가 된 뒤 가족들 가운데 자신의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들을 모두 숙청했다. 이 권력 투쟁으로 그의 첫 아내 아르시노에 1세도 추방되었다. 아르시노에 1세는 트라키아의 왕인 리시마쿠스의 딸이었다. 그후 프톨레마이오스는 누이인 아르시노에 2세와 재혼했다. 이 사건은 그리스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알렉산드리아 궁정 시인들은 이 결혼을 축하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왕국과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어려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시리아와 소아시아 및 에게 해 지역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배를 확대하는 한편,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에서도 영향력을 주장했다. 이집트가 인도와 로마에 사절단을 보낸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정치적·상업적 이해관계가 얼마나 광범위했는가를 반영한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이집트의 새로운 전쟁(기원전 274~270)은 경쟁 왕국들의 기본 입장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가 마케도니아 왕인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 대항하여 일으킨 크레모니데아 전쟁(기원전 268 ?~261)은 에게 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동맹국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에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2세 및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의 연합 세력과 맞서 싸운 제2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60경~253)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군사작전의 실패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외교 수완으로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 그는 우선 안티고노스를 부추겨 강화조약(기원전 255)을 맺은 다음, 딸 베레니케를 자신의 적인 안티오코스 2세에게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시집 보내는 방법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제국과 이집트의 전쟁을 끝냈다. 그의 정치적 수완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안티오코스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의 딸과 결혼하기 전에 전처인 라오디케를 쫓아내야 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당분간 셀레우코스 왕조의 적개심에서 해방되고 이집트 경제가 제공하는 재물의 뒷받침을 받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다시 그리스에 전념하여,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과 다시 맞서 싸우라고 그리스를 부추겼다. 마케도니아군이 그리스에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에게 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거듭 발휘하여 크레모니데아 전쟁 때 당한 패배를 설욕했다. 그는 또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3세를 키레네 왕 마가스의 딸과 결혼시켜 자신의 상황을 더욱 개선했다. 그때까지 마가스는 상당히 골치아픈 이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세계에서 완전한 주도권을 누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경쟁자들을 그의 외국 영토가 이루고 있는 넓은 완충지대 너머에 묶어둠으로써 이집트에 되도록 유리한 정세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그는 여기에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가장 심한 타격의 예봉은 모두 동맹국들에 돌리고 자신이 입은 군사적 상처는 외교수단으로 치료했다. 아내이며 누이인 아르시노에 2세가 그에게 미치는 영향은 특히 외교 문제에서 상당히 중요했지만, 당시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한 것만큼 광범위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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