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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비능(軻比能)은 단석괴 사후에 뒤를이어 삼국 시대의 위(魏)나라에 자주 침입했다. 삼분된 중국을 공격할 수 있는 동북방의 세력은 둘이 있었는데 첫째는 거란의 원조(遠祖)로 불리기도 하는 가비능(軻比能)이 오환과 연합한 구 선비세력이고 둘째는 고구려이다. 가비능은 선비족 의 왕으로, 조조 가 이민족과 싸우지 않고 회유책을 썼을 때 조조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218년 에 조조에게 항복하였으나, 다시 적대 관계가 되었다. 이윽고 대군(代郡)의 오환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침공. 조조는 조창에게 토벌을 명하여 가비능을 격파한다. 가비능은 위군과 싸웠지만 패배한다. 그러나 가비능은 포기하지 않고 231년에 제갈공명의 북벌에 호응해 거병하여, 위나라와 싸웠다. 결국 위나라가 가비능을 쓰러뜨린 때는 235년이다. 단석괴 치세 때와 똑같이 가비능 때에도 각 분야에서 한인들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235년 위(魏)나라가 보낸 자객에 의해 가비능이 살해되자 선비는 구심력을 잃었다. 분류:가비 분류:선비족
- 가비능(軻比能)은 본래 소종(小種) 선비(鮮卑)인데, 용건(勇健=용맹하고 굳셈)하고 단법(斷法)이 공평하며, 재물을 탐하지 않아, 무리들이 그를 추대하여 대인으로 삼았다. 부락(部落)이 새(塞)에 가까웠는데, 원소가 하북을 점거한 이후로 중국인들이 다수 망반(亡叛)해서 그에게 귀부하여, 병기와 갑옷, 방패 만드는 것을 가르치고, 문자(文字)도 꽤 배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부중을 통솔할 때 중국을 본뜨니, 출입하고 사냥할 때 정휘(旌麾=깃발)를 세우고, 북을 울리며 진퇴했다. 가비능의 무리가 강성해져 공현(控弦) 10여 만기에 이르렀다. 매번 약탈하여 재물을 얻을 때마다 고르게 나누어주고, 눈앞에서 한결같이 결정하여 끝내 사사로이 하는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 무리들이 사력을 다하게 되었고, 다른 부(部)의 대인들이 모두 그를 경애하며 꺼렸으나, 단석괴에는 미치지 못했다. 분류:선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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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비능(軻比能)은 단석괴 사후에 뒤를이어 삼국 시대의 위(魏)나라에 자주 침입했다. 삼분된 중국을 공격할 수 있는 동북방의 세력은 둘이 있었는데 첫째는 거란의 원조(遠祖)로 불리기도 하는 가비능(軻比能)이 오환과 연합한 구 선비세력이고 둘째는 고구려이다. 가비능은 선비족 의 왕으로, 조조 가 이민족과 싸우지 않고 회유책을 썼을 때 조조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218년 에 조조에게 항복하였으나, 다시 적대 관계가 되었다. 이윽고 대군(代郡)의 오환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침공. 조조는 조창에게 토벌을 명하여 가비능을 격파한다. 가비능은 위군과 싸웠지만 패배한다. 그러나 가비능은 포기하지 않고 231년에 제갈공명의 북벌에 호응해 거병하여, 위나라와 싸웠다. 결국 위나라가 가비능을 쓰러뜨린 때는 235년이다. 단석괴 치세 때와 똑같이 가비능 때에도 각 분야에서 한인들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235년 위(魏)나라가 보낸 자객에 의해 가비능이 살해되자 선비는 구심력을 잃었다. 분류:가비 분류:선비족
- 가비능(軻比能)은 본래 소종(小種) 선비(鮮卑)인데, 용건(勇健=용맹하고 굳셈)하고 단법(斷法)이 공평하며, 재물을 탐하지 않아, 무리들이 그를 추대하여 대인으로 삼았다. 부락(部落)이 새(塞)에 가까웠는데, 원소가 하북을 점거한 이후로 중국인들이 다수 망반(亡叛)해서 그에게 귀부하여, 병기와 갑옷, 방패 만드는 것을 가르치고, 문자(文字)도 꽤 배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부중을 통솔할 때 중국을 본뜨니, 출입하고 사냥할 때 정휘(旌麾=깃발)를 세우고, 북을 울리며 진퇴했다. 가비능의 무리가 강성해져 공현(控弦) 10여 만기에 이르렀다. 매번 약탈하여 재물을 얻을 때마다 고르게 나누어주고, 눈앞에서 한결같이 결정하여 끝내 사사로이 하는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 무리들이 사력을 다하게 되었고, 다른 부(部)의 대인들이 모두 그를 경애하며 꺼렸으나, 단석괴에는 미치지 못했다. 분류:선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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