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강수 선생(强首先生)은 신라 대문장가였다. 강수선생은 대소면 삼호리 출신으로 대소면 쇠머리는 강수선생 출생지 입증하고 있다. 신라시대(新羅時代) 문장(文章)으로 찬란한 업적을 남기고 간 강수선생(强首先生)에 대하여 지금까지 잘 알려진 기록을 토대로 음성지역에 강수선생(强首先生)과 연관하여 지명화(地名化)된 이름들이 알려져 있다. 지역의 지명(地名)에는 소역사(小歷史)가 담겨져 있으며 지명은 인간이 만들기 때문에 인명(人名)과 관직(官職)또는 국명(國名)들이 곁들여 만들어진다. 음성에는 강수(强首)의 원명인 우두(牛頭), 처가(妻家)인 부곡(釜谷)과 강수 선생이 살던 곳의 원국명(原國名)이었던 가량(加良), 그후 변천한 가라(加羅), 가야(加也)와 중원경(中原京)이었을 때, 사량(沙梁)에 얽힌 지명(地名)들이 산재(散在)하고 있다. 지금까지 강수선생은 임강수(任强首)라 하여 임씨(任氏)가 성으로 알고 있으나 임씨가 아닌 석씨(昔氏)임을 충주 사적에 있으면서 그 출생지가 밝혀지지 아니하였다. 강수선생은 중원경(中原京) 사량부(沙梁部)사람인데 왜 본래는 임나(任那) 가량인(加良人)이라 하였다. 가량(加良)에 연관된 이름과 가량후(加良後) 존재하였던 임나(任那)의 가라(加羅),가야(加也) 등의 이름이 있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김유신은 무공의 힘이 있었고, 강수(强首)는 문장(文章)의 힘이 있었다. 그리하여 문무왕(文武王)은 말하기를 강수는 자임하여 능히 서한(書翰)으로 중국(中國)과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 두나라에 뜻을 전하였기 때문에 우호를 맺는데 성공하였다. 우리 선왕이 당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 백제를 평정한 것이 바로 무공이라고 하지만 또한 문장의 도움도 있었으니 강수의 공(功)을 어찌 소홀히 생각할까 보냐?하고는 사량의 직위를 주고 녹봉을 더하여 해마다 조(租) 이백석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나타난다. 또 당나라에서 태종왕(무열왕)에게 사자를 보내 소서를 전하였는데 난해한 곳이 있어 왕이 강수를 불러 묻자 한번 보고는 해석하므로 왕이 기이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 칭하였다 하여 성(姓)이 임씨(任氏)가 되어 충주 사적(忠州 史蹟)에 임강수(任强首)로 전해온다. 임씨(任氏)를 성(姓)으로 삼은 우리나라 임씨(任氏)는 곡성(谷城), 과천(果川),아선(牙善),장흥(長興),진주(晋州),풍천(豊川),함풍(咸豊),회덕(懷德) 등8개 임씨(任氏)가 있으나 이 성씨(姓氏)속에 강수의 이름은 전하는 곳이 없다. 무열왕(武烈王)이 임씨(任氏) 성(姓)을 사성(賜姓)하였으나 강수 선생은 임씨(任氏)를 사용하지 아니하였는데도 충주사적(忠州史蹟)에는 임강수(任强首)로 명시하여 강수선생을 임씨(任氏)로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강수(强首)라 하여 성(姓)이 강씨(强氏)인가 하고 만생보(萬生譜)를 보았더니 충주 강씨(忠州强氏)밖에 없다. 충주(忠州) 강씨(强氏) 씨족사(氏族史)에 기록(記錄)하기를 강씨(强氏)는 진(晋)나라의 대부(大夫) 강침의 후의로 송(宋)나라 휘종(徽宗)때 강준(强浚)과 송나라 이종(理宗)때 경순(警巡) 강신(强伸) 등이 전해 오고 있으나 동래(東來) 시기(時期)는 알수 없다. 역사상에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문무왕(文武王)때의 학자(學者)이며 문장가(文章家)인 강수(强首)가 나타나나 그가 석제(昔蹄)의 아들인것을 보면 석씨(昔氏)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였다. 그리하여 강수선생의 성씨(姓氏)를 알기 위하여 「삼국사기」 열전(列傳) 강수편(强首扁)을 상고해 본다. 강수(强首)는 중원경(中原京) 사량(沙梁)사람인데 부친(父親)은 석제 금마이다.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여 강수선생의 성씨를 고찰코자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부친은 석제이고 부친의 관직은 십칠관등(十七官等)의 열한째인 금마인 것이다. 부친의 성(姓)은 석씨(昔氏)이고 이름은 제라 하였으니 석씨(昔氏)의 성(姓)인 것이다. 석씨(昔氏)는 월성(月城) 즉 , 경주석씨(慶州昔氏)로써 석탈해왕(昔脫解王)의 18세손에 강수(强首)의 이름이 있고 아버지는 금마 석제이며 중원경(中原京) 사량인(沙梁人)이라 하였고 할아버지는 관직이 파간(波干)으로 김선덕왕(金善德王)때에 첨성대(瞻星臺)를 짓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한 오원(五源)이라 하였다. 숭신전(崇信殿)에서 1995년 간행한 월성석씨(月城昔氏) 대동보(大東譜)의 내용을 영인본(影印本)하면 다음과 같다. 강수선생은 월성석씨(月城昔氏)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강수선생의 성(姓)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강수(强首)에게는 아들 우연(羽延)과 종철(宗喆)형제를 두었으나 그후 자손이 끊어지고, 강수(强首)는 4형제이나 아우 세사람의 자손도 끊어져 후손이 없다. 더욱이 석씨(昔氏)에게는 자손이 귀하여 유구한 역사를 지닌 성씨(姓氏)임에도 불구하고 절손된 손(孫)이 많아 현재 음성군내에 2가구뿐이고 우리나라 석씨(昔氏)인구는 약4천명에 불과하다. 석씨(昔氏) 대동보(大東譜)에 의하여 첨성대(瞻星臺)와 분황사(芬皇寺) 창건자(創建者)가 강수선생의 조부(祖父) 석오원(昔五源)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 강수선생의 성씨(姓氏)를 찾으므로 밝혀져 더불어 수확이라 하겠다. 강수(强首)는 임강수(任强首)라고 칭하였으나 근본은 석강수(昔强首)라는 것을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강수전(强首傳)의 부친(父親)이름과 월성석씨(月城昔氏) 대동보(大同譜)를 통하여 고찰하였다. 삼국사기 열전(列傳) 강수전(强首傳)에 보면 신(臣)은 본래 임나(任那) 가량(加梁)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하였다. 그러면 임나(任那)는 어디인가? 대동지지(大東地志) 충주연혁에 보면 본임나국후위백제소유(本任那國後爲百濟所有)라 하여 본래 임나국으로 후에 백제 소유가 되었다하여 충주가 백제 땅이 되기전 임나국(任那國)이었음을 말하였다. 충주는 삼국중에 처음 백제땅이 되기전 삼국시대(三國時代)전에는 임나국(任那國)이었음을 알 수 있어 임나국(任那國)은 충주에 있었던 나라임이 명백하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도 중원경(中原京)은 지금의 충주이니 그렇다면 임나국(任那國)은 곧 충주라 하겠다.라고 기록하므로 임나국(任那國)은 충주에 사였던 국가였다. 신라말(新羅末) 문성왕 16년 (854)에 태어나 경명왕(景明王) 7년(923)에 죽은 신라말(新羅末)의 진경국사(眞鏡國師)는 속성이 김씨(金氏)로 이름은 번희인데 임나왕족(任那王族)의 후의라 하여 임나국(任那國)은 6가야와 함께 가야계의 김씨(金氏)가 세운 나라처럼 김씨(金氏)의 나라로서 가야계의 나라들과 무관하지 않다 하겠다. 그러므로 임나국(任那國)이 충주이므로 충주에 속하였던 옛 땅에서 가량(加良)을 고찰하기로 하였다. 지금의 음성은 신라(新羅)가 통일(統一)되어 경덕왕(景德王) 16년(757) 음성이라는 지명이 생기기까지 충주에 속하였던 지역이었고 처음 음성이라는 고을이 생겼으나 9개읍면중 음성읍, 원남면에 국한된 소현(小縣)이었고 나머지 지역은 조선말(朝鮮末)가지 충주에 속한 땅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는 음성의 이름이 생기기전 이므로 지금의 음성군 전역(全域)이 충주에 속해 있었다. 지리지를 통하여 보면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에는 가서리(加西里-골가래실) 가동리(加東里-방죽가래실)가 있고 삼성면 용성리에는 가산동(加山洞-가산이)이 있으며 삼성면 양덕리에는 양곡리(良谷里-양지울)가, 대사리에는 온양터(良村)등의 자연부락 이름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 가량(加良)의 加자와 良자의 여운이 존재하고 있음은 가량(加良)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겠다. 더욱이 이곳은 다음에 말하고자 하는 강수선생의 출생지로 칭하는 우두(牛頭-쇠머리)의 근방(近方)이며 강수선생의 처가(妻家)인 부곡(釜谷)과 인접한 곳이다. 국내많은 학자들이 임나(任那)를 논하였으나 임나(任那)가 충주에 있었던 나라임을 논한 바는 없고 더불어 가량(加良)을 충주로 말하지 않았다.여기서는 모든 것을 생략하고 강수선생과 연관하여 그 기록에 의하여 그에 연관된 지명을 충주의 지명과 고찰하여 두고자 한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성왕이 가량(加良)과 더불어 관산성(管山城)을 래공(來攻)한 기록이 있다. 관산성(管山城)은 충주 용관동에 있는 지명으로 신라가 이곳을 쳐들어 올 때 백제군 이 근처산에서 망을 보았다.고 지명지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진흥왕 때에도 이곳을 가량(加良)이라 불렀던 같다. 강수선생(强首先生), 임나(任那), 가량(加良), 관산성(管山城)등 모든 것을 충주지역에 놓고 흐름의 역사를 고찰하면 이해할 수 있으나 다른 지역으로 놓고 본다면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후 신라(新羅)는 북한산가지 점령하여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북한산(北漢山)에 세우고 충주를 국원소경(國原小京)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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