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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색불루(索弗婁) 또는 색부루는 고조선의 22대 단군이였다. 단군 조선 개국후 1000년이 지나서 신시 지역 북쪽에 있던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高登)의 손자이다. 단군 색불루는 탁발 선비족의 시조이며, 부여 시조 동명왕은 탁발 선비족의 후손, 고구려는 부여의 후손이다. 기원전 1286년에 조부인 우현왕 고등을 세습하여 우현왕이 된 색불루(索弗婁)는 21대 소태 단군이 당시 국정총괄하는 5가의 만장일치 추대 방식을 외면하고 수유족 좌현왕 서우여에게 단군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여러차례 간하여 말렸으나 끝내 듣지 않자 쿠테타를 일어켜 스스로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蘇台)는 그에게 반기를 든 반란 군 색부루(索弗婁)와 싸워서 패하고, 아리수라는 강이 있는 아사달에 숨게 되었다. 우현왕의 아들 색부루가 즉위하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했다.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丙申元年) 단제 명하사 녹산을 보수 건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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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색불루(索弗婁) 또는 색부루는 고조선의 22대 단군이였다. 단군 조선 개국후 1000년이 지나서 신시 지역 북쪽에 있던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高登)의 손자이다. 단군 색불루는 탁발 선비족의 시조이며, 부여 시조 동명왕은 탁발 선비족의 후손, 고구려는 부여의 후손이다. 기원전 1286년에 조부인 우현왕 고등을 세습하여 우현왕이 된 색불루(索弗婁)는 21대 소태 단군이 당시 국정총괄하는 5가의 만장일치 추대 방식을 외면하고 수유족 좌현왕 서우여에게 단군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여러차례 간하여 말렸으나 끝내 듣지 않자 쿠테타를 일어켜 스스로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蘇台)는 그에게 반기를 든 반란 군 색부루(索弗婁)와 싸워서 패하고, 아리수라는 강이 있는 아사달에 숨게 되었다. 우현왕의 아들 색부루가 즉위하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했다. 색불루는 즉각 개천령(盞天鈴)을 지휘관으로 한 토벌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서우여 군과의 싸움에서 불행히도 개천령이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쿠데타로 군력을 쥐게된 단군 조선 22대 색부루단군 이후에 병권 분열과 내분으로, 결국 3조선으로 나눠졌다. 22세 단군 색불루 계축년은 색불루 임금의 원년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왕이었던 색부루가 군사로 혁명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한문식인 조선으로 바꾸면서부터 정식 명칭이 되었다.“색부루 왕검 원년 5월 삼한(신한, 맑한, 밝한: 왕들의 칭호)의 이름을 삼조선(신조선 맑조 선 밝조선: 분국의 칭호)으로 개칭하였다. 색불루는 차기 단제로 지명되었던 서우여와 그 지지자를 무마시키기 위하여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를 번한의 왕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새로이 고조선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제22대 단군 색불루는 상나라와 싸워 이긴 후 은나라의 도읍(안양)을 점령하였고 얼마 있지 않아 화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 아홀은 뒤에 다시 크게 싸워 상나라를 깨트리고 그 국경 안까지 들어가서 지금의 강소성 지역인 회대땅을 평정하였고 마침내 해대(海岱)의 위에 주둔하였다.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丙申元年) 단제 명하사 녹산을 보수 건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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