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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야국(安邪國),안사,아사, 아라가야(阿羅伽倻)또는 안라국은 현재의 함안군 일대이다. 아라가야가 일어선 곳이다. 안야국은 삼한시대에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에 있었던 소국으로〈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으로 그 이름이 나온다. 안야·아라(阿羅)·아시량(阿尸良)으로 불렸다. 변한 12국의 하나다. 아라가야의 라(羅)를 야(耶)로 적기도 한다. 일본의 다파라국(합천)과 안라국(安羅國)은 이웃하고 살며 같은 동족의 백성들이다. 옛 웅습성(熊襲城)이 지금의 규슈(九州)이며 웅본성(熊本城,구마모또시로)이라 한다. 왜(倭)나라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이다. 부여의 협보는 구마모또에 진출하여 다라국(多羅國)을 세우고 휴우가(日何)의 안라국(安羅國)과 연합하여 사마대국(邪馬臺國)을 세운 인물이다. 가야는 낙동강 하구의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 낙동강 서안의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 낙동강 서안의 함안을 중심으로 하는 아라가야, 남해안의 고성을 중심으로 하는 소가야 등으로 나누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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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야국(安邪國),안사,아사, 아라가야(阿羅伽倻)또는 안라국은 현재의 함안군 일대이다. 아라가야가 일어선 곳이다. 안야국은 삼한시대에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에 있었던 소국으로〈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으로 그 이름이 나온다. 안야·아라(阿羅)·아시량(阿尸良)으로 불렸다. 변한 12국의 하나다. 아라가야의 라(羅)를 야(耶)로 적기도 한다. 일본의 다파라국(합천)과 안라국(安羅國)은 이웃하고 살며 같은 동족의 백성들이다. 옛 웅습성(熊襲城)이 지금의 규슈(九州)이며 웅본성(熊本城,구마모또시로)이라 한다. 왜(倭)나라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이다. 부여의 협보는 구마모또에 진출하여 다라국(多羅國)을 세우고 휴우가(日何)의 안라국(安羅國)과 연합하여 사마대국(邪馬臺國)을 세운 인물이다. 가야는 낙동강 하구의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 낙동강 서안의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 낙동강 서안의 함안을 중심으로 하는 아라가야, 남해안의 고성을 중심으로 하는 소가야 등으로 나누어진다. 가야는 대개 3천∼3천5백명 가량의 '소국(小國)'들이었으나, 김해의 구야국(狗邪國)과 함안의 안야국 (安邪國)은 2만∼2만5천명 정도의 '대국(大國)'이였다.상호간의 규모와 서열에 따라 일정한 차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 구야국 신지[拘邪秦支]와 안야국 축지[安邪·支]가 가장 서열이 높았으며, 다른 소국들은 대외 관계에 있어서 그들의 결정을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야국 동광의 산출지에는 황철광이 함께 산출되고 있어 동광의 개발과 함께 철광석도 채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야국 당시에도 이러한 자원을 이용하여 주변지역과 교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아라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연맹의 구성원으로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낙랑·왜 등과의 교역이 활발하였다. 가야는 특히 뛰어난 철기문화를 한반도와 일본에 전파시켰으며 함안· 진해 · 창원 · 칠원 중심의 아라가야권 세력을 형성하였다. 400년에 금관 가야가 고구려의 침략으로 힘을 잃은 뒤,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고, 이후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안라국이 중심이 되어 가야 연맹을 주도하였다. 대가야와 아라 가야도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561년(진흥왕 22년)에는 남쪽의 안라국을 흡수하고 신라의 영토임을 나타내는 창녕비를 세웠다. 가야의 여러 나라 중 삼한시대부터 6세기 중엽까기 지속적으로 그 위상을 유지한 나라 안라(安羅), 안야국(安邪國)이였던 현재 함안에 남아있는 도항리 말산리 고분군은 실제로는 1000기가 넘는 고분이 산 전체를 뒤덮고 있다. 아라가야의 고분문화는 전기, 중기, 후기의 3시기로 나눌 수 있고, 중기의 무덤 양식과 유물의 특징에 따라 다시 세분화 된다. 중기는 아라가야의 전성기로서 서기 5세기대의 약 100년 동안이다. 경남 함안은 옛 안라국(安羅國)의 터전으로 옛 무덤의 거대한 물결이 함안 말산리 / 도항리 고분군에 있다. 일본식민학자들이 고증한 천황의 속국이란 안라국은 지금의 일본 큐슈(구주)에 안라국이 있었다. 일본서기 흠명기 기록(흠명5년)을 인용하여 안라국을 '아라가야'와 동일 시 하였다. 식민학자들이 이룩해 놓은 것을 추종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는 이미 아라가야는 신라에게 멸망되고 없어졌다. 왜 왕권과 안라와의 관계는 종속적 동맹관계에서 진일보한 종속형태였으며, 6세기에 30여년동안 백제와 안라(安羅)는 왜국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일본'이란 명칭도 '부'(府)라는 제도도 없던 흠명천황(欽明天皇) 재위 기간(539~571)에 아라가야(안라국·함안)에 있던 가야와 왜의 외교·무역관리 기관에 '임나일본부'라는 가상의 명칭을 자의적으로 부여하였다. 안라국만의 독특한 무덤양식으로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안라국(아라가야) 만의 독특한 무덤축조기법이 유물을 안치하는 공간으로 알고 있던 감실(龕室)을 들보시설로 재해석한 결과다. 여러 철기 부장품과 함께 국내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의 말갑옷이 수습되어 5세기초 대고구려전을 수행했던 안라국 왕자의 모습을 떠올려준다. 비롯 고구려군에 패퇴했다고는 하나 가야 연합군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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