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dbkwik:resource/9UszRitl9f-2lyT44_huvQ==   Sponge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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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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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Batu Han.JPG|thumb|right|250px|터키의 Söğüt에 있는 바투의 흉상]] 바투(1205년 ~ 1255년)는 몽골제국 킵차크 한국의 칸(재위:1242년~1255년)으로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쥬치 칸의 둘째 아들이다. 쥬치의 아들들 가운데 훌륭한 임금이란 뜻의 바투가 아버지의 속령에 대한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바투의 영토는 이르티쉬의 서쪽인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또는 약튜빈스크, 우랄스크, 아다지, 호레즘 본토(히바)를 포함하였고, 또한 킵착인들의 땅부터 볼가 강 서쪽의 정복지인 제베와 수베에테이의 원정으로 얻은 땅을 를 포함하였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스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나와 바투와 다른 칭기스 칸의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으로 나타난다. 우구데이는 쥬치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킵차크 한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린다. 몽골 전승에 의하면 현명하고 온화한 왕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훌륭한 임금'이라는 별명이 주어졌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에게는 무자비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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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Batu Han.JPG|thumb|right|250px|터키의 Söğüt에 있는 바투의 흉상]] 바투(1205년 ~ 1255년)는 몽골제국 킵차크 한국의 칸(재위:1242년~1255년)으로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쥬치 칸의 둘째 아들이다. 쥬치의 아들들 가운데 훌륭한 임금이란 뜻의 바투가 아버지의 속령에 대한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바투의 영토는 이르티쉬의 서쪽인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또는 약튜빈스크, 우랄스크, 아다지, 호레즘 본토(히바)를 포함하였고, 또한 킵착인들의 땅부터 볼가 강 서쪽의 정복지인 제베와 수베에테이의 원정으로 얻은 땅을 를 포함하였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스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나와 바투와 다른 칭기스 칸의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으로 나타난다. 우구데이는 쥬치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킵차크 한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린다. 몽골 전승에 의하면 현명하고 온화한 왕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훌륭한 임금'이라는 별명이 주어졌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에게는 무자비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다. 1237년에 바투 칸이 러시아의 도시 쿠르스크, 벨고로드, 랴잔 등을 파괴했고 1238년에는 러시아 노브고로드 주의 크레스테츠키 군 을 침략했다. 1241년 킵차크 칸국의 바투 칸이 사조강 전투에서 헝가리의 벨라 4세를 무찔렀다. 그는 칭기즈 칸 가문의 장로로서 제국의 대칸을 둘러싼 권력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대칸 옹립자'도 알려져 있다. 1241년에 우구데이가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우구데이의 아들인 구유크와 킵차크 한국의 바투 간에 분쟁이 발생했다. 1246년, 구유크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칸위에 올랐다. 구유크의 즉위 이후 구유크와 바투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재위 3년째인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닫았지만 구유크의 사망으로 무산됐다. 구유크가 사망한 이후 바투는 톨루이 계의 소르칵타니와 손을 잡고 우구데이계간의 분쟁이 다시 발생하게 됐다. 1251년에 툴루이의 장남인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톨루이 계의 몽케를 칸위에 올렸다. 바투와 그의 아들 사르타크가 죽었을 때 바투의 형제 베르케가 킵차크 한국을 계승하였다. 베르케는 몽골의 그의 사촌들과 통합하려하지 않았으며 훌라구 칸과는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베르케는 중국을 그의 이론적인 상부로 공식적으로 인식하였다. 사실 베르케는 그때까지 독립적인 군주였다. 다행스럽게도 베르케는 유럽을 공략하는 데 바투와 이해를 공유하지 않았다. 바투는 적어도 두 아이가 있었는데 사르타크 칸과 토코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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