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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균(許筠, 1569년 음력 11월 3일~1618년 음력 8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작가, 정치가였다. 작품 《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으로 판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수(惺叟).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학문에 뛰어난 집안이어서 아버지 엽(曄), 두 형인 성(筬)과 봉(篈), 그리고 누이인 난설헌(蘭雪軒) 등이 모두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2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26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삼척 부사·공주 목사 등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반대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후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뽑혀 중국에 가서 문명을 날리는 한편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조선조 최고 권력층 집안 출신이면서도 특권에 자만하거나 도취하지 못하였던 그 분! 당대 최고 학자로서도 손색이 없었음에도 결코 자신에 만족할 수 없는 최고 양심인이었다.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의 도리가 전혀 없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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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許筠, 1569년 음력 11월 3일~1618년 음력 8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허균의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성소(惺所)로 불렸다. 허균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강릉이 낳은 위대한 문학가다. 허균, 허난설헌 생가 바로옆에는 이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전시해 놓은 기념관이 있다. 강릉이 낳은 대표적인 작가 남매를 기리는 기념관 치고는 너무 작고 조촐하다. 허균은 조선 중기의 학자· 문인· 정치가 로 1569년(선조 2)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 불꽃처럼 살다가 1618년 광해군 10년 역모죄로 능지처참 당한다. 분류: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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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허균(許筠, 1569년 음력 11월 3일~1618년 음력 8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허균의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성소(惺所)로 불렸다. 허균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강릉이 낳은 위대한 문학가다. 허균, 허난설헌 생가 바로옆에는 이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전시해 놓은 기념관이 있다. 강릉이 낳은 대표적인 작가 남매를 기리는 기념관 치고는 너무 작고 조촐하다. 허균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에게는 그만큼 복잡한 요소들이 많이 있다. 그는 명문 집안에서 자유분방한 천성과 높은 학문적 재능을 타고 태어났다. 그는 문장 실력을 타고났고 일생 박학(博學)하고 문재(文才)가 걸출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비교적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예술적인 기질이 길러졌다. 홍길동전은 조선 광해군 시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사상가이던 허균이 쓴 최초의 한글소설이다. 허균은 혼란한 시대에 잦은 국난과 외침, 파쟁에 시달리면서도 부패하여 무너져 가는 나라를 걱정하면서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였는데, 중요한 점은 당시까지 광해군이 허균 선생님을 암묵적으로 지지했었고 역으로 그를 기반으로 해서 혁명을 성공시키려 하였다. 허균은 조선 중기의 학자· 문인· 정치가 로 1569년(선조 2)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 불꽃처럼 살다가 1618년 광해군 10년 역모죄로 능지처참 당한다. 분류:홍길동
- 허균(許筠, 1569년 음력 11월 3일~1618년 음력 8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작가, 정치가였다. 작품 《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으로 판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수(惺叟).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학문에 뛰어난 집안이어서 아버지 엽(曄), 두 형인 성(筬)과 봉(篈), 그리고 누이인 난설헌(蘭雪軒) 등이 모두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2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26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삼척 부사·공주 목사 등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반대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후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뽑혀 중국에 가서 문명을 날리는 한편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때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이첨과 결탁하여 폐모론을 주장하면서 왕의 신임을 받아 예조 참의·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나,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역적으로 형을 당한 까닭에 그의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성수시화 惺叟詩話〉·〈학산초담 鶴山樵談〉·〈성소부부고 惺所覆藁〉 등 일부만이 남아 전한다. 그는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문인으로서 그는 소설 작품·한시·문학비평 등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홍길동전〉은 그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을 제안했다. 〈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 등은 그가 지은 한문소설인데, 여기서는 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의미 있게 살아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남다른 삶의 모습과 사상을 기술했다. 조선조 최고 권력층 집안 출신이면서도 특권에 자만하거나 도취하지 못하였던 그 분! 당대 최고 학자로서도 손색이 없었음에도 결코 자신에 만족할 수 없는 최고 양심인이었다.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의 도리가 전혀 없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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