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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성 읍성(箕城邑城)은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 194-1의 읍성(이 700m,면적 52,000㎡)이다.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 에 있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토축 읍성. 기성읍성에 관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평해군 읍토성조에 ‘주회이백구십사보(周回二百九十四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해의 구호(舊號)는 기성(箕城)으로 1357년(공민왕 6)에 기성현이 평해군으로 편입되면서 군소재지를 현재의 평해읍으로 옮겨왔다. 토축 읍성은 기성현 시절 군의 치소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동해 바닷가를 달리는 국도 7호선을 따라 영덕에서 울진을 향해 가다보면 기성면 척산리에 이른다. 서쪽에서 동해로 흐르는 정명천(正明川)을 가로지르는 기성교(箕城橋)를 지나면 곧바로 나타나는 첫 동네가 척산리 척산마을이다. 기성읍성은 척산마을에 위치하며, 동해 바닷가에서 서쪽으로 800m 떨어진 거리에 있는 해안 읍성이다. 기성읍성은 척산마을을 서쪽·북쪽·동쪽에서 마치 양팔로 감싸 안은 듯한 형상의 지형으로 남쪽이 터진 삼태기형을 이루고 있다. 성 안에는 현재 6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동쪽으로는 기성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정명천이 흐르고 있다. 북쪽은 또 하나의 돌출된 능선과 연이어져 있으며, 북동쪽에는 기성초등학교가 있다. 남쪽의 평해읍성과는 7.5㎞ 떨어져 있다. 기성읍성의 현존 길이는 약 700m이며, 성 안의 면적은 52,000㎡이다. 토성의 서쪽 능선에는 높이 2m 전후의 토루가 있다. 성 안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며, 토성벽의 상부 폭은 3m 전후이다. 성 밖으로는 경작에 의해 형태가 다소 유실되었으나, 1단의 턱을 만들고 정명천의 절벽과 맞닿아 있어 외부에서의 접근이 용이하지 못하다. 토성의 서북쪽 성벽은 상부 폭이 14m에 이르며, 성 안팎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토성 상부가 14m에 이르는 것은 오랜 세월 삭토(削土)가 많이 진행되었음을 뜻한다. 기성초등학교 옆의 토성 상부 폭은 7m이고, 역시 성 안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성 밖으로는 폭 3m의 외부 회곽도를 만들어 놓았고, 다시 급경사의 절벽인 성 밖으로 연결되어 있다. 토성의 동쪽 해발 42m 지점은 본 토성 내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성의 곡각부에 해당되며, 상부는 매우 평탄하여 16×13m의 장방형 대지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성 안팎을 조망하기에 매우 편리해서 이곳은 망루 등의 건물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을 정점으로 토성벽은 동남쪽의 지세를 따라 내려오고 있는 형국이다. 능선의 척추부를 따라 토성벽이 축조되어 있으며, 상부의 폭은 2m 내외이고, 성 안은 다소 완만하며, 성 밖의 기성초등학교 쪽으로는 경사가 급한 편이다. 기성읍성의 토성벽 주변에서는 마제 석부 1점이 발견되었다. 마제 석부는 검은 화강암 재질에 운모편이 조밀하게 박혀 있어 매우 반들거린다. 인부의 형태는 조개날 돌도끼[蛤刃石斧]의 형태인 양날형이며, 몸통의 단면 형태는 네 각을 죽인 마름모꼴이다. 양날 돌도끼는 전쟁과 수렵용으로 이용되거나 나무를 벌채·절단·절개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다. 이 역시 실생활에 직접 사용했던 도구로써 인부와 몸통에 많은 박락 현상이 확인된다. 기성읍성 안에는 현터로 전해오는 옛터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대밭이 무성하여 별도의 정밀 조사가 이루어져야만 그 규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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