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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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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녹수 (張綠水, ? ~ 1506년)는 조선 연산군의 후궁이다. 경국지색의 미모와 강철마저 녹이는 현란한 화술로 일국의 군주를 용상에서 끌어내린 희대의 요부인 장녹수의 아버지는 충청도 문의현령을 지낸 장한필이고 어머니는 첩이었다. 그 때문에 녹수는 성종의 종제인 제안대군의 노비로 살아야 했다.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張漢弼)은 문과에 급제, 성종 19년에 충청도 문의 현령까지 지냈습니다. 장녹수는 악명을 드날리며 불꽃같이 한 시대를 살다 간 처절한 여인이다. 그녀는 어지러운 난세에 태어났다. 숙부 세조(제7대)가 어린 조카 단종(제6대)을 죽이고 등극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국가 동량이 비명에 죽어 갈 때다. 왕실 안에서도 변고가 끊이지 않았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1438~1457·추존 덕종)가 20세로 요절하고 둘째 아들 해양대군(1450~1469·예종)도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20세로 승하했다. 이즈음 연산군은 큰어머니 순천 박씨를 겁탈한 후여서 짐승 취급을 받고 있었다. 순천 박씨(월산대군 부인)는 제안대군의 사촌 형수이기도 했다. 연산군이 장녹수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제안대군에게 말했다 제안대군이 얼른 엎드려 부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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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녹수 (張綠水, ? ~ 1506년)는 조선 연산군의 후궁이다. 경국지색의 미모와 강철마저 녹이는 현란한 화술로 일국의 군주를 용상에서 끌어내린 희대의 요부인 장녹수의 아버지는 충청도 문의현령을 지낸 장한필이고 어머니는 첩이었다. 그 때문에 녹수는 성종의 종제인 제안대군의 노비로 살아야 했다.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張漢弼)은 문과에 급제, 성종 19년에 충청도 문의 현령까지 지냈습니다. 장녹수는 악명을 드날리며 불꽃같이 한 시대를 살다 간 처절한 여인이다. 그녀는 어지러운 난세에 태어났다. 숙부 세조(제7대)가 어린 조카 단종(제6대)을 죽이고 등극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국가 동량이 비명에 죽어 갈 때다. 왕실 안에서도 변고가 끊이지 않았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1438~1457·추존 덕종)가 20세로 요절하고 둘째 아들 해양대군(1450~1469·예종)도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20세로 승하했다. 세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예종의 가족사도 불행했다. 원비 장순왕후 청주 한씨(한명회 셋째 딸)가 장남 인성대군을 출산하다 함께 졸서했다. 계비 안순왕후 청주 한씨를 다시 맞아들여 세자 제안대군(1466~1525)을 낳았으나 세자가 4세 되던 해 예종이 돌연 훙서했다. 왕위 등극서열 1위였던 제안(齊安)대군은 유충한 나이인 데다 요동치는 조정 권력의 희생제물이 되고 말았다. 보위는 엉뚱하게도 13세의 사촌형 자을산군(제9대 성종·추존 덕종 둘째 아들)의 차지가 됐다. 성종 원비(공혜왕후) 청주 한씨는 당시 조정실세였던 영의정 한명회의 넷째 딸이었다. 성장하면서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제안대군은 술과 음률로 소일하며 악기를 즐겨 연주했다. 그의 집에는 풍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들과 어울려 통음하다가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제안대군 집 여종으로 태어나 장녹수는 제안대군 집의 가비(家婢·여종)로 태어났다. 절색을 타고 나는데야 신분의 높고 낮음이 무슨 구실이겠는가. 비록 종의 딸이었으나 녹수의 용모는 어려서부터 출중했고 살결은 백옥보다도 더 고왔다. 제안대군과 풍류객들은 술자리를 열 때마다 꽃다운 기생들을 불러 춤과 노래를 즐겼다. 눈썰미가 남달랐던 녹수였다. 주인집 과객들 술시중을 들며 기생들의 가무를 홀로 익히고 시조음운까지 따라 잡았다. 길섶에 핀 아름다운 야생화를 어느 누가 마다하랴. 청명하늘의 항아(姮娥·보름달 속의 선녀)처럼 탐스러운 녹수를 온전히 놔 둘리 없는 건달 한량들이었다. 녹수는 일찍이 사내를 알게 됐다. 몸을 팔며 그녀는 기방에 적을 두고 기예와 무희를 배운 뒤 ‘녹수’란 기명(妓名)까지 올렸다. 망신을 염려한 제안대군은 자신의 집 가노(家奴·남자 종)와 짝을 지어 출입을 금지시켰다. 얼마 후 녹수는 아들을 낳았다. 고조선 시대부터 존재했던 노비제도는 갑오개혁(1894)으로 신분제도가 타파될 때까지 당시 사회를 꽁꽁 옭아맨 인간차별이었다. 사회계급은 적출(嫡出·양반과 양반가 딸의 정실소생)·양출(良出·양반과 양반가 딸의 측실소생)·서출(庶出·양반과 개가한 여자 혹은 천출집 딸의 소생)·천출(賤出·천민 혹은 노비들 간의 출생)로 구분지어 서출과 천출은 아예 과거조차 응시 못했고 관작 진출이 봉쇄됐다. 장녹수는 부모가 노비였고 가노에게 시집 가 그 자식조차 영원한 천출이었다. 세월이 흘러 연산군(1476~1506)이 보령 19세로 제10대 임금에 즉위했다. 연산군도 처음에는 왕도정치를 실현해 선정을 펼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는 천성적으로 학문을 기피한 데다 놀기를 좋아했다. 학식 높은 훈구대신과의 정치논쟁에서 항상 기죽고 사사건건 반대에 부딪쳐 임금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여기에 불을 지른 것이 생모 폐비 윤씨에 대한 죽음의 전말이었다. 간신 임사홍(?~1506)의 고자질에 눈이 뒤집힌 연산군은 수차례 사화를 일으켜 무고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젊은 임금의 광기는 엽색행각으로 돌변했다. 전국에서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기생을 선발해 흥청(興淸)이란 벼슬을 내리고 주지육림 속에서 국고를 바닥냈다. 백성들은 흥청이 나라를 망친다하여 ‘흥청망청’이라 했다. 그래도 연산군의 가슴은 늘 허망했다. 이럴 때마다 자주 찾아 속내를 털어놓는 종친이 열 살 위의 당숙 제안대군이었다. 그날도 연산군은 구중궁궐 경복궁을 벗어나 제안대군 집 대청에서 술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김없이 술시중을 들며 주안상을 들고 나온 장녹수가 눈에 띄었다. 이즈음 연산군은 큰어머니 순천 박씨를 겁탈한 후여서 짐승 취급을 받고 있었다. 순천 박씨(월산대군 부인)는 제안대군의 사촌 형수이기도 했다. 연산군이 장녹수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제안대군에게 말했다 “당숙은 참으로 복도 많소이다. 이런 미인과 한 집에서 기거를 하시다니….” 제안대군이 얼른 엎드려 부복했다. “전하, 소인 집 여종이옵니다. 마음에 드시면 함께 입궐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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