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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방(帶方)은 정확한 위치는 불명인데, 낙랑과 비교하면 패수의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며, 패대 지역이라고 할 때의 대는 대수(帶水)를 가리키는데, 이 대수는 지금의 요동 반도의 서쪽에 흐르는 요하의 동쪽에 위치한 어느 강으로 보인다. 난하가 되는 패수와 이 대수 사이에 낙랑과 진번이 위치하고 있는데, 진번은 바로 진한과 번한 사이의 땅이 되고 대수(帶水) 가까이에 있으며, 요하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고 구려의 동쪽에, 번한의 동북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된다. 요동 지역이 된다.
- 대방군(帶方郡)은 중국의 삼국시대의 중국 후한 헌제(後漢獻帝) 때에, 공손탁의 아들 군벌 공손강(公孫康)이 204년에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본래는 진번군의 일부였으나 기원전 82년에 낙랑군에 편입되었다가 이때에 분할되어 군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백제는 대방 태수의 딸 보과를 며느리로 맞았다. 대방군에 대한 미소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제9대 책계왕 원년(286)에 고구려가 대방군을 치자 책계왕은 구원을 하였지만 고구려와 대결하게 된다. 봉상왕(烽上王) 때 고구려는 선비족인 전연(前燕)의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을 두 차례 받는 등 위기를 겪다가 313년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병합하였다. 진(晉)나라는 세력이 약화되어 316년 멸망하였다. 그 과정에 낙랑군과 대방군에 대한 중국 왕조의 통제와 지원이 끊기게 되었다. 미천제 제위 3년 현도군을 공격하여 8천명을 생포하였다. 12년 요동의 서안평을 정벌하였다. 14년 후한 낙랑군을 멸망시킨다. 15년 후한 대방군 멸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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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대방(帶方)은 정확한 위치는 불명인데, 낙랑과 비교하면 패수의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며, 패대 지역이라고 할 때의 대는 대수(帶水)를 가리키는데, 이 대수는 지금의 요동 반도의 서쪽에 흐르는 요하의 동쪽에 위치한 어느 강으로 보인다. 난하가 되는 패수와 이 대수 사이에 낙랑과 진번이 위치하고 있는데, 진번은 바로 진한과 번한 사이의 땅이 되고 대수(帶水) 가까이에 있으며, 요하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고 구려의 동쪽에, 번한의 동북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된다. 요동 지역이 된다.
- 대방군(帶方郡)은 중국의 삼국시대의 중국 후한 헌제(後漢獻帝) 때에, 공손탁의 아들 군벌 공손강(公孫康)이 204년에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본래는 진번군의 일부였으나 기원전 82년에 낙랑군에 편입되었다가 이때에 분할되어 군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백제는 대방 태수의 딸 보과를 며느리로 맞았다. 대방군에 대한 미소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제9대 책계왕 원년(286)에 고구려가 대방군을 치자 책계왕은 구원을 하였지만 고구려와 대결하게 된다. 봉상왕(烽上王) 때 고구려는 선비족인 전연(前燕)의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을 두 차례 받는 등 위기를 겪다가 313년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병합하였다. 진(晉)나라는 세력이 약화되어 316년 멸망하였다. 그 과정에 낙랑군과 대방군에 대한 중국 왕조의 통제와 지원이 끊기게 되었다. 미천제 제위 3년 현도군을 공격하여 8천명을 생포하였다. 12년 요동의 서안평을 정벌하였다. 14년 후한 낙랑군을 멸망시킨다. 15년 후한 대방군 멸망시킨다. 서기 472년까지 백제의 대방군이 있는데 한수, 하수, 숭산, 사성, 아차성, 하수의 제방, 흙벽돌의 성터가 있어야 대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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