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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해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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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해의 수도 동모산은 길림성 돈화시 성산자산(吉林省 敦化市 城山子山) 발해가 맨 처음 나라를 세웠던 곳은 오늘날 중국의 길림성 돈화시의 성산자산(吉林省 敦化市 城山子山) 일대이다. 고구려가 망하고 당에 의해 營州부근으로 강제 이민당하였던 유민들은 30년만에 고향을 찾아와 동모산(東牟山)아래에 나라를 다시 세웠는데, '구국(舊國)'이라 부르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은 방어적 산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발해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는 목단강(牡丹江)건너 영승(永勝)유적과 함께 하고 있다. 발해가 이곳에서 수도를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또는 顯州)로 옮긴 시기는 대개 제3대 발해 문왕19년인 755년 경으로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동모산을 중심으로 한 수도 시기는 약 57년 정도였다. 수도를 옮긴 이유는 국력 신장과 인구증가에 따른 경제 문제가 가장 컸지 않았는가 한다. 그러나, 발해건국 초기의 동모산은 발해 건국과 적대세력의 방어라는 측면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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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해의 수도 동모산은 길림성 돈화시 성산자산(吉林省 敦化市 城山子山) 발해가 맨 처음 나라를 세웠던 곳은 오늘날 중국의 길림성 돈화시의 성산자산(吉林省 敦化市 城山子山) 일대이다. 고구려가 망하고 당에 의해 營州부근으로 강제 이민당하였던 유민들은 30년만에 고향을 찾아와 동모산(東牟山)아래에 나라를 다시 세웠는데, '구국(舊國)'이라 부르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은 방어적 산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발해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는 목단강(牡丹江)건너 영승(永勝)유적과 함께 하고 있다. 발해가 이곳에서 수도를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또는 顯州)로 옮긴 시기는 대개 제3대 발해 문왕19년인 755년 경으로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동모산을 중심으로 한 수도 시기는 약 57년 정도였다. 수도를 옮긴 이유는 국력 신장과 인구증가에 따른 경제 문제가 가장 컸지 않았는가 한다. 그러나, 발해건국 초기의 동모산은 발해 건국과 적대세력의 방어라는 측면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던 곳이다. 발해의 두번째 도읍지라고 여겨지는 중경 현덕부는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자(吉林省 和龍縣 西古城子) 발해 5京 중의 하나인 중경현덕부는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자(서고성)에 있다. 잠시나마 발해의 수도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회적인 측면과 다량의 양식을 생산할 수 있었다는 경제적 측면, 그리고 지방행정과 신라와의 대립관계에서 필요했다는 정치-군사적 측면이 생각될 수 있는 곳이다. 세번째 도읍지는 동경 용원부이다. 발해의 제3대 발해 문왕 때에 이곳으로 서울을 잠시 옮겼던 원인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많게는 경제적인 원인을 들고 있다. 즉, 발해가 일본과의 무역을 더욱 원할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왕말기 등장하는 발해 귀족(國人)들의 항쟁으로 인한 정치적 배려에서 나온 결과라는 점과 발해와 신라의 대립 관계에서 나온 남진책의 일환이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9년의 짧은 기간이었다고 할지라도, 이곳이 잠시나마 발해국의 수도였다는 점과, 다른 때에도 발해 5京의 하나로서 신라나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이곳이 중요한 지역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발해에서는 신라로 가는 '신라도(新羅道)'와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日本道)'가 각각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가 이곳 동경용원부가 중심이 되었지 않았는가 한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훈춘이 중국의 개방특구로 지정되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이곳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하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발해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곳은 160년 가량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이다. 이곳에 수도를 옮긴 것은 이곳이 동모산 지역보다 군사적 입지 조건은 좋지 않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많은 사람의 식량이 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한다. 따라서 이곳에서 살 수 있는 인구도 내외성의 크기와 지역 등을 고려하여 80만에서 120만명 정도로 추정한다. 발해 역사의 전환기에 왕위에 올라 50여 년간 '문치'를 실시하여 왕국의 기틀을 확고히 굳혀 놓은 발해 문왕 대흠무가 793년(대흥 57년)에 여기 동경 용원부에서 병으로 죽자 발해 지배층 내부에서는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투쟁이 벌어졌다. 문왕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다. 맏아들은 부왕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 아들은 이른바 '숙위'라는 명목하에 인질로 잡혀 당나라 수도 장안에 가 있었으며 그외 세 아들은 모두 국내에 있었으나 문왕의 아들들은 그 누구도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왕 대조영의 방계 손자이며 문왕 대흠무의 동생벌이 되는 족제 대원의가 발해국의 제4대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발해 문왕의 자손들은 궁정 정변을 일으켜 대원의를 죽이고 왕권을 빼앗았으니 문왕의 맏아들 대굉림의 아들인 대화여가 발해의 5대왕으로 추대되었는데 그가 바로 발해 성왕이었다. 성왕은 지배층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쇠약해진 왕국을 다시 진흥시키려는 목적에서 년호를 중흥으로 고치고 수도를 동경 용원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겨갔던 것이다. 분류:발해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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