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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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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안성 [建安城] 은 [역사] 고구려 때, 랴오허 강(遙河江) 유역의 가이핑(蓋平) 부근에 있던 성이다. 당태종은 안시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남으로는 건안성을, 북으로는 백암성을 공격했다. 청석령 산성(青石岭, 평곽성(平郭城), 고려성 산성(高麗城山城), 고려성산산성(高麗城山山城), 고려성자산성(高麗城子山城), 고려산성(高麗山城), 고려성(高麗城)으로 불리는 이 성은 건안성으로 비정된다. 성의 둘레길이는 약 5km이며, 동서의 직경은 약 1.5km, 남북의 직경은 약 1km이다. 남북 양면의 성벽은 산등성이 위에 현지에서 돌을 주워 쌓았고, 동서 양면의 성벽은 흙을 다져 쌓았다. 건안성은 요하(遼河)선을 따라 설치한 중요한 방어 거점 중의 하나로 당(唐)나라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에,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이 요하를 건너 건안성을 공격하여 고구려병 수천명을 죽였으나 함락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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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안성 [建安城] 은 [역사] 고구려 때, 랴오허 강(遙河江) 유역의 가이핑(蓋平) 부근에 있던 성이다. 당태종은 안시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남으로는 건안성을, 북으로는 백암성을 공격했다. 청석령 산성(青石岭, 평곽성(平郭城), 고려성 산성(高麗城山城), 고려성산산성(高麗城山山城), 고려성자산성(高麗城子山城), 고려산성(高麗山城), 고려성(高麗城)으로 불리는 이 성은 건안성으로 비정된다. 성의 둘레길이는 약 5km이며, 동서의 직경은 약 1.5km, 남북의 직경은 약 1km이다. 남북 양면의 성벽은 산등성이 위에 현지에서 돌을 주워 쌓았고, 동서 양면의 성벽은 흙을 다져 쌓았다. 건안성은 요하(遼河)선을 따라 설치한 중요한 방어 거점 중의 하나로 당(唐)나라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에,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이 요하를 건너 건안성을 공격하여 고구려병 수천명을 죽였으나 함락하지는 못하였다. 이어 당군이 개모성(蓋牟城)·요동성(遼東城)·백암성(白巖城)을 차례로 함락하고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으며,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킨 수군총관 장량(張亮)은 육로로 건안성으로 진주하여, 고구려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안시성과 건안성이 당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성을 지킴으로써 결국 당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당시의 전투를 보면 남쪽의 건안성과 북쪽의 안시성은 고구려의 1차 방어선의 기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북쪽으로 열려진 계곡에 문지(門址)가 남아 있는데, 성의 주 출입구였다. 서북문은 옹성(甕城)의 형태로 구축되어 있는데 현재는 많이 파괴되었다. 성벽은 석축(石築)과 토축(土築)을 적절히 혼합하여 축조하였다. 서쪽 성벽 부분은 주로 석축으로 쌓았으며, 성벽 위에는 너비 5∼6m의 마도(馬道)가 시설되어 있다. 또 남서쪽 성벽은 흙을 다져쌓은 판축토성이다. 남문의 주위에는 토축으로 2개의 치(稚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를 설치하여 방어 능력을 높이고 있다. 남동부 성벽은 험준한 암벽을 이용하여 부분적으로 석축하였으며, 동부와 북부 성벽은 토축으로 구축하였다. 성안에는 작은 산이 있는데, 그곳에 건물지가 남아 있다. 또 우물 5곳과 저수지가 남아 있다. 성안은 상당히 넓은 편으로 여러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현재 곳곳에서 기와편·토기편·마구(馬具)·철촉 등이 출토된다. 이 건안성은 사료상으로는 645년(보장왕 4) 당과의 전쟁기사에서 처음 나타나지만, 실제의 축조 연대는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차지한 5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건안성(建安城은 만주의 산성이다. 개현 청석령향의 고려성산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고구려 때의 건안성(建安城)으로 보고 있다. 개현을 벗어나 영구쪽으로 얼마 안 가 옛날 건안성에 부속되었던 청석관(靑石關)이 나오고 왼쪽에 봉화대가 있다. 고려성촌에 들어가면 산밑에 바로 건안성 남문이 나온다. 이 남문에서 오른쪽 능선에는 돌로 쌓은 석성이 이어지고 그 나머지 부분은 대부분 토축인 토석축 산성이다. 현지에서는 연개소문과 동생 연개소진이 함께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건안성을 중심으로 북쪽 대석교(大石橋) 백채자향(百寨子鄕)에 보성(堡城)이 있고 아래로는 서둔향(徐屯鄕)의 연통산과 쌍대자향(雙臺子鄕)의 성자구산성, 양운향의 분영(奮英)에 각각 보성(堡城)이 있다. 분영산성은 거의 흔적이 없으나 마을에서는 아직도 고려산성이라 부르고, 백채자향과 쌍대자향의 보성은 분명하게 그 자리가 남아 있다. 가장 특이한 것은 서둔향의 연통산인데 분명한 문이 있고 축성술도 아주 뛰어나 보인다. 당 태종이 백암성을 공격하여 승리했을 때(6월) 이 세적에게 건안성을 치도록 명령하자 이 세적이 이를 반대한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전부 요동에 있습니다. 이제 안시성를 지나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 고구려인들이 우리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면 어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안시성이 항복하면, 당당하게 북을 울리며 행군하여 건안성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건안성이 안시성보다 남쪽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지는 것이다. 한편 안시성 공략작전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당나라 진영에서는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자"는 논의가 일어난다. 이 때 장손 무기가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무리가 아직도 10만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약 오골성으로 간다면, 고구려 군사들이 반드시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이다." 고 하여 계획을 중지하였다. 이렇게 보면 안시성싸움에 투입될 군사력을 분산하고, 안시성을 놔두고 오골성과 평양으로 직행할 경우 추격하여 보급로를 차단하는 중요한 임무와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신성·건안성·주필산에서 있었던 세 차례의 큰 싸움에서 우리 군대와 당 나라 군사 중에 사망자가 많았으며, 마필도 대단히 많이 죽었다]고 한 것을 보면 중국 기록과는 달리 건안성은 신성, 주필산(안시성)과 함께 당나라 군사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었던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31년(영류왕 14)에 세운 고구려의 성이다. 당나라는 나당전쟁에서 패하자 백제 땅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랴오둥[遼東]으로, 웅진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기면서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갔다. 나당전쟁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백제에 있는 당군을 축출하려고 670년 3월 고구려군과 함께 양동작전으로 정면 공격함으로써 개시되었다. 676년 11월 기벌포(伎伐浦:금강 하구) 앞바다에서의 마지막 격전을 끝으로 전쟁은 신라의 일방적인 승리로 결말이 났고, 당나라는 그해 웅진도독부를 만주의 건안성으로 옮겼다. 이로 인해 신라는 한강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분류:안산성 분류:만주의 산성 분류:건산성 분류:요서 분류:고려성 분류:요서 10성 분류:개현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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