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키니우스 [Licinius,정식 이름은 Valerius Licinianus Licinius. ?~ 325]는 로마의 황제(308~324 재위)이다. 평민에게 모든 공직을 개방한 리키니우스 법 단결과 분열의 악순환은 로마 공화정의 특성이 되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호민관(護民官) 리키니우스(BC 4세기)와 섹스티우스의 제안에 따라 BC 367년에 통과되었다. 고대 로마의 신분 투쟁사의 한 시기를 그은 법이다.이 법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해소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획기적인 법률인 '리키니우스 법'이 성립 되었다. 이 법은 우선 피오라고 자기 이름을 댔다. 일리리아의 농부집안 출신으로 군대에서 출세해 곧 군인 출신 황제인 친구 갈레리우스에게 황제(Augustus)로 임명되었다(308. 11). 처음에는 서부지역 통치를 맡기로 했지만 이탈리아·아프리카·스페인이 막센티우스에게 점령당하고 콘스탄티누스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다스리게 된 후로는 판노니아를 통치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로마에서 모반한 서로마 황제 맥시미안의 복잡한 동란에 끼어들게 되었으며 황제 대리인 세베루스는 리치니우스(Licinius)로 교체되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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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니우스 [Licinius,정식 이름은 Valerius Licinianus Licinius. ?~ 325]는 로마의 황제(308~324 재위)이다. 평민에게 모든 공직을 개방한 리키니우스 법 단결과 분열의 악순환은 로마 공화정의 특성이 되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호민관(護民官) 리키니우스(BC 4세기)와 섹스티우스의 제안에 따라 BC 367년에 통과되었다. 고대 로마의 신분 투쟁사의 한 시기를 그은 법이다.이 법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해소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획기적인 법률인 '리키니우스 법'이 성립 되었다. 이 법은 우선 피오라고 자기 이름을 댔다. 콘스탄티누스와 잠시 강화를 맺었으나 그뒤 판노니아·모이시아 속주를 빼앗겼다. 이후 10년 동안 전쟁이 없었지만 불안한 상태가 계속되었으며 그동안 그는 군사력을 키우고 막대한 보물을 모았다. 그러나 324년 아드리아노플과 크리소폴리스(지금의 터키 위스퀴다르)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져 테살로니카로 추방당한 뒤 이듬해 반란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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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니우스 [Licinius,정식 이름은 Valerius Licinianus Licinius. ?~ 325]는 로마의 황제(308~324 재위)이다. 평민에게 모든 공직을 개방한 리키니우스 법 단결과 분열의 악순환은 로마 공화정의 특성이 되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호민관(護民官) 리키니우스(BC 4세기)와 섹스티우스의 제안에 따라 BC 367년에 통과되었다. 고대 로마의 신분 투쟁사의 한 시기를 그은 법이다.이 법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해소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획기적인 법률인 '리키니우스 법'이 성립 되었다. 이 법은 우선 피오라고 자기 이름을 댔다. 일리리아의 농부집안 출신으로 군대에서 출세해 곧 군인 출신 황제인 친구 갈레리우스에게 황제(Augustus)로 임명되었다(308. 11). 처음에는 서부지역 통치를 맡기로 했지만 이탈리아·아프리카·스페인이 막센티우스에게 점령당하고 콘스탄티누스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다스리게 된 후로는 판노니아를 통치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자 그의 유럽 대륙 통치권을 넘겨받았으며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의 배다른 누이동생 콘스탄티아와 결혼했다. 같은 해에 트라키아의 아드리아노플 동쪽에 있는 추룰룸에서 동부지역 황제 막시미누스를 패배시켜 아시아로 쫓아냈으며 막시미누스는 그곳에서 죽었다. 이리하여 제국의 절반인 동부지역을 전부 자신의 통치하에 두었다. 콘스탄티누스와 잠시 강화를 맺었으나 그뒤 판노니아·모이시아 속주를 빼앗겼다. 이후 10년 동안 전쟁이 없었지만 불안한 상태가 계속되었으며 그동안 그는 군사력을 키우고 막대한 보물을 모았다. 그러나 324년 아드리아노플과 크리소폴리스(지금의 터키 위스퀴다르)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져 테살로니카로 추방당한 뒤 이듬해 반란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막시미누스와 싸울 때에는 자기 병사들에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뒤에 군대에 강요한 것과 아주 비슷한 일신교(一信敎) 기도형식을 쓰도록 했다. 리키니우스는 깨끗이 승리를 거두고, 막시미누스는 자살했다. 313년 6월 5일 그리스도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교회의 재산을 되돌려주겠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당시 활동했던 라틴계 작가 락탄티우스와 주교 유세비우스로부터 개종자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그리스도교도들로부터 따돌림당해 320년경에는 가벼운 종교적 박해를 가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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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니우스 [Licinius,정식 이름은 Valerius Licinianus Licinius. ?~ 325]는 로마의 황제(308~324 재위)이다. 평민에게 모든 공직을 개방한 리키니우스 법 단결과 분열의 악순환은 로마 공화정의 특성이 되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호민관(護民官) 리키니우스(BC 4세기)와 섹스티우스의 제안에 따라 BC 367년에 통과되었다. 고대 로마의 신분 투쟁사의 한 시기를 그은 법이다.이 법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해소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획기적인 법률인 '리키니우스 법'이 성립 되었다. 이 법은 우선 피오라고 자기 이름을 댔다. 일리리아의 농부집안 출신으로 군대에서 출세해 곧 군인 출신 황제인 친구 갈레리우스에게 황제(Augustus)로 임명되었다(308. 11). 처음에는 서부지역 통치를 맡기로 했지만 이탈리아·아프리카·스페인이 막센티우스에게 점령당하고 콘스탄티누스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다스리게 된 후로는 판노니아를 통치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로마에서 모반한 서로마 황제 맥시미안의 복잡한 동란에 끼어들게 되었으며 황제 대리인 세베루스는 리치니우스(Licinius)로 교체되었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자 그의 유럽 대륙 통치권을 넘겨받았으며 312년 막시민 다이아(Maximin Daia) 황제는 리치니우스(Licinius)와 전쟁을 하기 위해 군인들이 필요했다. 막시미누스와 싸울 때에는 자기 병사들에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뒤에 군대에 강요한 것과 아주 비슷한 일신교(一信敎) 기도형식을 쓰도록 했다. 리키니우스는 깨끗이 승리를 거두고, 막시미누스는 자살했다.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의 배다른 누이동생 콘스탄티아와 결혼했다. 같은 해에 트라키아의 아드리아노플 동쪽에 있는 추룰룸에서 동부지역 황제 막시미누스를 패배시켜 아시아로 쫓아냈으며 막시미누스는 그곳에서 죽었다. 이리하여 제국의 절반인 동부지역을 전부 자신의 통치하에 두었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두 명의 황제가 있었다. 제국의 서쪽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와 동쪽을 차지한 리치니우스였다. 두 사람은 313년 2월 수행원을 이끌고 북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만났다. 313년 6월 5일 그리스도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교회의 재산을 되돌려주겠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당시 활동했던 라틴계 작가 락탄티우스와 주교 유세비우스로부터 개종자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그리스도교도들로부터 따돌림당해 320년경에는 가벼운 종교적 박해를 가했다. 콘스탄티누스와 잠시 강화를 맺었으나 그뒤 판노니아·모이시아 속주를 빼앗겼다. 이후 10년 동안 전쟁이 없었지만 불안한 상태가 계속되었으며 그동안 그는 군사력을 키우고 막대한 보물을 모았다. 그러나 324년 아드리아노플과 크리소폴리스(지금의 터키 위스퀴다르)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져 테살로니카로 추방당한 뒤 이듬해 반란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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