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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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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국(襄國)은 후조 또는 석조 (石趙)의 수도였다. 한나라 초, 조나라 재상 장이는 상산왕(常山王)으로 삼고 조(趙)땅을 봉지로 내린 다음 양국(襄國)에 도읍토록 했다. 그 밖에도 경포는 구강왕(九江王), 오예는 형산왕(衡山王)으로 삼았다. 312년 무의미한 약탈 전쟁을 그만두고 하북의 기주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기위해 석륵은 양국(襄國)을 거점으로 하북을 점거하고 사실상의 독자적인 정권을 세운다. 건흥2년(314년) 후조 석륵이 양국에 도읍을 정하였다. 후조의 시조 석륵은 원래 유연의 휘하에서 서진(西晉) 토벌에 큰 공적을 세웠다. 당시 석륵이 왕업 기반을 세우는데 장애가 되는 호랑이는 진(晉)의 대사마(大司馬), 상서령(尙書令)이였다. 349년 석호가 죽자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졌고, 석호의 양자였던 한족 염민(?閔)이 350년에 정권을 탈취하고 염위(?魏)를 건국했다. 이때 염민은 후조의 주요 민족이던 갈족을 대량학살했다. 동진이 관망하면서, 염위는 형세에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350 년 말에 염민은 후조의 수도 양국을 포위했고, 351 년에 전연과 요익중(姚?仲 )이 후조에게 원군을 파견하였으나 , 351년에 염민에게 멸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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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국(襄國)은 후조 또는 석조 (石趙)의 수도였다. 한나라 초, 조나라 재상 장이는 상산왕(常山王)으로 삼고 조(趙)땅을 봉지로 내린 다음 양국(襄國)에 도읍토록 했다. 그 밖에도 경포는 구강왕(九江王), 오예는 형산왕(衡山王)으로 삼았다. 312년 무의미한 약탈 전쟁을 그만두고 하북의 기주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기위해 석륵은 양국(襄國)을 거점으로 하북을 점거하고 사실상의 독자적인 정권을 세운다. 건흥2년(314년) 후조 석륵이 양국에 도읍을 정하였다. 후조의 시조 석륵은 원래 유연의 휘하에서 서진(西晉) 토벌에 큰 공적을 세웠다. 당시 석륵이 왕업 기반을 세우는데 장애가 되는 호랑이는 진(晉)의 대사마(大司馬), 상서령(尙書令)이였다. 전조 수도 평양은 거의 비게 되었으나, 318년에는 유총이 죽었다. 아들 유찬이 뒤를 이었으나, 아버지의 장인이며 그의 장인인 재상 근준은 유찬을 죽이고, 유씨 황족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몰살시킨다. 양국에 주둔하던 석륵과 장안을 지키던 유총의 조카 유요는 각각 평양을 향해 진군해 평양을 점거하여 근준과 근씨 일가를 모조리 참살하였다. 유씨 황족들이 몰살당했으니 평양은 황폐해져서 유요는 황제에 올라 장안으로 수도를 옮긴다. 319년 11월, 유요가 칭제하자 갈인 석륵이 양국에서 자립하여 조왕을 칭했다. 석륵과 유요는 화북을 양분하여 10년 동안 대립하였다. 유요는 형양에서 하내에 이르는 낙양 방어의 주요 거점들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유요의 군사들은 후조의 수도였던 양국(襄國)을 지척에 두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328년, 석륵은 유요의 군대를 격파하고 유요를 사로잡음으로써 전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329년에는 석호(石虎)를 파견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전조를 멸망시켰다. 330년 석륵은 회수 이북에서 서로는 섬서와 감숙에 걸친 화북 전역 대부분을 그의 세력권으로하여 제위에 올랐다. 전조가 멸망하자 석륵은 천왕(天王)을 칭하였고 330년에는 황제에 즉위했다. 333년 석륵이 죽자 태자 석홍(石弘)이 즉위했으나, 334년, 석륵의 친족 석호가 석홍을 살해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석호는 적극적으로 외정에 나섰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후조의 국력을 소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전조에 대해서는 전에 유연의 무장(武將)이었던 석륵(石勒)이 세운 후조(後趙)가 양국(襄國)에 도읍을 두고 전조를 정복하여 화북을 통일하였으나, 후조도 내부분열로 멸망하였다. 349년 석호가 죽자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졌고, 석호의 양자였던 한족 염민(?閔)이 350년에 정권을 탈취하고 염위(?魏)를 건국했다. 이때 염민은 후조의 주요 민족이던 갈족을 대량학살했다. 동진이 관망하면서, 염위는 형세에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신흥왕 석지(石祗)가 일시적으로 후조를 부활시켰다. 조의 옛 수도 양국(襄國)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석지(石祗)는 석민이 위를 건국하자, 스스로 조의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후조의 잔여세력을 끌어모아서 염위와 대치한다. 350 년 말에 염민은 후조의 수도 양국을 포위했고, 351 년에 전연과 요익중(姚?仲 )이 후조에게 원군을 파견하였으나 , 351년에 염민에게 멸망당했다. 오이(후과)를 황과로 고쳐 부르기 시작한 것은 후조(趙) 왕조 시기부터다. 후 조 왕조의 시조 스러(石勒)는 중국 갈족(?族, 중국 북방의 한 민족)으로 샹궈(襄國, 지금 허난성의 邢臺)를 창건해 황제에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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