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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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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동파 (蘇東波, 1036~1101)는 이름을 식(軾)이라 하고 자(字)를 자첨(子瞻) 또는 화중(和仲)이라 한다. 그는 서기 1037년 1월 8일 북송(北宋) 인종(仁宗) 때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 즉 미산(眉山) 근교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된다. 서기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蘇洵)은 두 아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를 데리고 상경(上京)하여 이들의 詩를 당대의 대 시인이며 고관대작이었던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자 격찬을 받는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는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도 나란히 합격했지만 때 마침 모친상을 당하자 벼슬자리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서기 1060년 상(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 즉 개봉(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나란히 합격했으며, 이어 동파는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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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동파 (蘇東波, 1036~1101)는 이름을 식(軾)이라 하고 자(字)를 자첨(子瞻) 또는 화중(和仲)이라 한다. 그는 서기 1037년 1월 8일 북송(北宋) 인종(仁宗) 때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 즉 미산(眉山) 근교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된다. 서기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蘇洵)은 두 아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를 데리고 상경(上京)하여 이들의 詩를 당대의 대 시인이며 고관대작이었던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자 격찬을 받는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는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도 나란히 합격했지만 때 마침 모친상을 당하자 벼슬자리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서기 1060년 상(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 즉 개봉(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나란히 합격했으며, 이어 동파는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개봉(開封)에 남게 된 동생 소철(蘇轍)과 헤어져 홀로 임지로 떠난다. 봉상부 즉 서안(西安)은 서주(西周:기원전 11세기 경으로 지금부터 3,000년 전의 옛 주왕조를 이른다.) 이래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그는 공자묘(孔子墓)의 석고(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와 개원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와 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鳳翔八觀)이란 책에서 자세히 풀어놓은것으로 보아 고문(古文)과 회화(繪畵)에 대단한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봉상부(鳳翔府)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서기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가 병을 얻어 죽었고. 이듬해 아버지 소순(蘇洵)마저 병으로 죽자, 동파는 아버지의 관을 고향으로 옴겨가 상(喪)을 치렀으며 3년상을 탈상(脫喪)하고 상경한다. 그 해에는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의 고위직에 있던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한 개혁파가 득세하여 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해 균륜법(均輪法)을 만들어 시행했고, 가난한 농촌에 저리로 자금을 빌려줘 농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청묘법(靑苗法)등 당시로써는 대단히 파격적 법률인 이른바 신법(新法)을 제정하여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新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조정의 눈총을 받아 감관고원(監官告院)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만을 담당하는 별 볼 일 없는 직책으로 발령이 나자, 화딱지가 난 그는 지방 근무를 자청하여 절강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자사로 근무할 것을 상주(上奏) 했고, 눈에 가시로 여겼던 조정은 흔쾌히 발령을 내려 항주로 그를 내려보낸다. 바로 이때 항주의 유명한 호수인 서호(西湖)의 제방을 그의 지시로 새로 쌓았는데, 소동파가 쌓다고 하여 "소제(蘇堤)"라 이름이 붙은 제방이 지금도 소동파의 석상과 함께 명승지로 남아 지난날을 기리고 있다. 이에 자세한 내용은 몇 년 전에 항저우 여행을 하며, 본 블로그에 소개 했던 "항저우... 서시(西施)를 닮은 호수(湖水) 서호(西湖)"에 대충 설명했던 관계로 여기선 생략코자 한다. 이어 그는 밀주(密州), 서주(徐州), 호주(湖州)등지를 돌며 지방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후저우 즉 호주(湖州)의 지사(知事)로 있던 서기 1079년에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詩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었고, 개봉으로 끌려가 뼈저린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이 이른바 소동파의 "필화사건(筆禍事件)"이다. 이 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烏臺詩案)이란 책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다행히 사형(死刑)을 면한 그는 100일 간의 옥살이를 치르고 황주(黃州) 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 縣)의 단련부사(團練副使)라는 지방관으로 좌천 된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못하게 하며, 황주를 떠나면 안 되는 거주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면서 발령 낸 관직은 일종의 유배형(流配刑)에 해당되었다. 황주(黃州)에서의 생활은 매우 궁핍했다. 부인은 가난에 찌들리며 하루종일 누에고치로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양잠일을 해야 했고, 동파는 군부대가 있던 자갈투성이의 병영터를 빌려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살아가야 했다. 이 땅을 그는 "동파(東坡)" 즉 "동쪽 언덕"이라 이름 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칭 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의 대표적 명작으로 불리는 지금 소개코자 하는 "적벽부(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바로 이곳에서 였다. 서기 1085년 신종(神宗)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어린 철종을 뒤에서 조정하는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왕권과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것에 중점을 뒀으며 뤄양 즉 낙양(洛陽)에 운둔해 있던 사마광(司馬光)을 불러들여 왕안석(王安石) 일파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시행한 개혁법인 신법(新法)들을 모조리 폐지해 버린다. 이러자 구법(舊法)을 신봉하던 소동파(蘇東坡)도 다시 발탁되어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시작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 등의 중요 요직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사마광(司馬光)의 신법 폐지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던 모역법(募役法)까지 폐지하는 등 너무 과격해지자, 소동파는 때 마침 지방관직을 마치고 상경한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그에 대한 강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몇 년 후 사마광이 죽자 당쟁이 다시 불붙었고, 섭정을 하던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비로서 철종이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펼친 정치, 친정(親政)이 비로소 시작된다. 철종은 할머니가 섭정 당시 패지시켰던 신법들을 모조리 부활시켰으며, 구법파인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는 운명에 처해 혜주사마(惠州司馬)로 강등 된다. 철종은 소동파에 대한 탄압을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주변 정치인들의 모함까지 들끓자, 소동파를 하이난 도 즉 중국 남쪽 끄트머리 섬인 배트남 근처의 해남도(海南島)로 유배을 보낸다. 소동파는 하루 한 번 이상 세차게 소낙비가 퍼붓는 습한 기후와 풍토병에 시달렸으며, 들짐승과 다름없던 그곳의 원시부족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7년 간이나 이어간다. 그는 무지하고 목매한 그들에게 농사짓는 법과 글자를 가르치고 문화생활의 편리성을 알려주며, 원시의 때를 벗겼던 해남도(海南島)의 진정한 선구자요 큰 스승이였다. 중국 남단 배트난 근처의 제주도 크기와 비슷한 섬 하이난도(海南島)는 지금은 옛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개벽에 가까운 꿈의 휴양지로 탈바꿈 했다. 그가 머물던 곳에는 소동파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 그를 존경하며 기리는 유적과 공덕비들이 여럿 세워져 있다. 아무튼... 세월이 흘러 7년만에 철종이 죽고, 휘종(徽宗)이 뒤이어 즉위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고 하는 명예직에 불과하지만 벼슬자리에 봉해져, 수도인 카이펑 즉 개봉(開封)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노쇄한 몸에 병을 얻어 창저우 즉 창주(常州)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때 소동파의 나이가 6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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