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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왕(神文王, ? ~ 692년)은 신라의 제31대 왕(재위: 681년 ~ 692년)이다. 성은 김(金). 휘는 정명(政明), 자는 일소(日怊). 문무왕의 첫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였다. 왕비는 소판 김흠돌(金欽突)의 딸이 였다. 만파식적이란 신라시대 전설상의 피리인데 이 피리를 불면 병란도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장마 때에는 비가 개며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 지는지라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였다. 설총(薛聰)은 신문왕에게 정치의 방법을 깨우치는 이야기를 하여그의 총애를 받았던 것이다. 신문왕은 기꺼이 설총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그가 들려 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왕자들에게 가르쳐주도록 했다고 전한다. 신문왕 당시 서라벌에서 대구 달구벌로 이전하라는 요구가 있어 이를 계획하다가 그만뒀다. 당시 서라벌은 인구 100만의 거대도시로 세계 4대도시 로마 장안 콘스탄티노플과 경주중 하나였다. 낭산 남쪽 끝자락에 사천왕사터가 있으며,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신라 제31대 왕인 신문왕의 능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습니다. 이 무덤의 지름은 29.3미터이고 높이는 7.6미터이다. 분류:신라의 왕
- 신문왕(神文王, ? ~ 692년)은 신라의 제31대 왕(재위: 681년 ~ 692년)이다. 성은 김(金). 휘는 정명(政明), 자는 일소(日怊). 문무왕의 첫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였다. 왕비는 소판 김흠돌(金欽突)의 딸이 였다. 만파식적이란 신라시대 전설상의 피리인데 이 피리를 불면 병란도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장마 때에는 비가 개며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 지는지라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였다. 설총(薛聰)은 신문왕에게 정치의 방법을 깨우치는 이야기를 하여그의 총애를 받았던 것이다. 신문왕은 기꺼이 설총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그가 들려 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왕자들에게 가르쳐주도록 했다고 전한다. 신문왕 당시 서라벌에서 대구 달구벌로 이전하라는 요구가 있어 이를 계획하다가 그만뒀다. 당시 서라벌은 인구 100만의 거대 도시로 세계 4대도시 로마, 장안, 콘스탄티노플과 경주중 하나였다. 낭산 남쪽 끝자락에 사천왕사터가 있으며,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신라 제31대 왕인 신문왕의 능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의 지름은 29.3미터이고 높이는 7.6미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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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왕(神文王, ? ~ 692년)은 신라의 제31대 왕(재위: 681년 ~ 692년)이다. 성은 김(金). 휘는 정명(政明), 자는 일소(日怊). 문무왕의 첫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였다. 왕비는 소판 김흠돌(金欽突)의 딸이 였다. 만파식적이란 신라시대 전설상의 피리인데 이 피리를 불면 병란도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장마 때에는 비가 개며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 지는지라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였다. 설총(薛聰)은 신문왕에게 정치의 방법을 깨우치는 이야기를 하여그의 총애를 받았던 것이다. 신문왕은 기꺼이 설총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그가 들려 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왕자들에게 가르쳐주도록 했다고 전한다. 신문왕 당시 서라벌에서 대구 달구벌로 이전하라는 요구가 있어 이를 계획하다가 그만뒀다. 당시 서라벌은 인구 100만의 거대도시로 세계 4대도시 로마 장안 콘스탄티노플과 경주중 하나였다. 낭산 남쪽 끝자락에 사천왕사터가 있으며,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신라 제31대 왕인 신문왕의 능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습니다. 이 무덤의 지름은 29.3미터이고 높이는 7.6미터이다. 분류:신라의 왕
- 신문왕(神文王, ? ~ 692년)은 신라의 제31대 왕(재위: 681년 ~ 692년)이다. 성은 김(金). 휘는 정명(政明), 자는 일소(日怊). 문무왕의 첫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였다. 왕비는 소판 김흠돌(金欽突)의 딸이 였다. 만파식적이란 신라시대 전설상의 피리인데 이 피리를 불면 병란도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장마 때에는 비가 개며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 지는지라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였다. 설총(薛聰)은 신문왕에게 정치의 방법을 깨우치는 이야기를 하여그의 총애를 받았던 것이다. 신문왕은 기꺼이 설총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그가 들려 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왕자들에게 가르쳐주도록 했다고 전한다. 신문왕 당시 서라벌에서 대구 달구벌로 이전하라는 요구가 있어 이를 계획하다가 그만뒀다. 당시 서라벌은 인구 100만의 거대 도시로 세계 4대도시 로마, 장안, 콘스탄티노플과 경주중 하나였다. 낭산 남쪽 끝자락에 사천왕사터가 있으며,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신라 제31대 왕인 신문왕의 능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의 지름은 29.3미터이고 높이는 7.6미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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