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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련씨(遙輦氏)는 거란 8부部의 하나인 요련부(遙輦部)를 말한다. 돌궐(突厥)에 대한 철륵 제부(鐵勒諸部)의 반란을 틈타 628년에 이르러 거란 8부가 모두 당(唐)에 신속하였다. 이후 대하씨(大賀氏)가 거란 8부部를 모두 통솔하였으며 세력이 약할때에는 가한(Khan可汗), 강성할때는 스스로 당조(唐朝)에 송막 도독(松漠都督)의 지위를 받아 거란 8부部를 다스렸는데, 요련씨(遙輦氏)의 굴렬(屈烈)이 무리의 신임을 얻어서 세력이 커지더니 730년에 이르러 결국, 대하씨(大賀氏)인 송막 도독(松漠都督府) 이소고(李邵固:재위,725~730)를 죽이고 스스로 가한(Khan,可汗)이 되었으며 이후로 거란 8부는 907년 질라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가 등장할 때까지 요련씨(遙輦氏)에서 칸을 선출하였다. 태조(太祖)-야율아보기(재위,916~926)-는 요련씨(遙輦氏)를 대신하여 질라부(迭刺部)의 무리로써 임황(帶海)에서 일어나 황도(皇都)를 건설하였다. 분류:거란의 군주 분류:복성 분류:요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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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요련씨(遙輦氏)는 거란 8부部의 하나인 요련부(遙輦部)를 말한다. 돌궐(突厥)에 대한 철륵 제부(鐵勒諸部)의 반란을 틈타 628년에 이르러 거란 8부가 모두 당(唐)에 신속하였다. 이후 대하씨(大賀氏)가 거란 8부部를 모두 통솔하였으며 세력이 약할때에는 가한(Khan可汗), 강성할때는 스스로 당조(唐朝)에 송막 도독(松漠都督)의 지위를 받아 거란 8부部를 다스렸는데, 요련씨(遙輦氏)의 굴렬(屈烈)이 무리의 신임을 얻어서 세력이 커지더니 730년에 이르러 결국, 대하씨(大賀氏)인 송막 도독(松漠都督府) 이소고(李邵固:재위,725~730)를 죽이고 스스로 가한(Khan,可汗)이 되었으며 이후로 거란 8부는 907년 질라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가 등장할 때까지 요련씨(遙輦氏)에서 칸을 선출하였다. 730년대부터 10세기초에 이르는 동안 거란 군장의 지위는 대하씨에서 요련씨(遙輦氏)로 넘어갔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카간[可汗 qaghan]을 칭하기도 하며 그 지위를 서서히 강화시켜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즉, 종래 세선제(世選制)의 외양을 보존하면서 군주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시책의(柴冊儀)라고 불린 즉위식을 처음으로 도입했고, 아울러 종래 3년 1선(選)의 교대지배제(交代支配制)도 폐지했다. 또한 청우백마 신앙(靑牛白馬神仰)을 중심으로 하는 팔부동원 설화(八部同源說話)가 보여주듯이 모두 동일한 시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의사혈연적 관계를 기초로 한 부족적 결속력도 강화되었던 시기이다. 그 러나 요련씨의 카간 독점을 타파하고 카간이 된 야율 아보기(耶律阿保機)는 종래 8부족 연합체를 붕괴시키고, 정복국가 군주에게 특유한 전제권을 장악하였다. 즉 요련씨의 마지막 카간인 요련흔덕근(痕德菫)의 시기에 그는 이리근(夷離菫 irkin)으로서 병마권(兵馬權)을 장악하고 해·실위(室韋)·우궐(于厥) 등 주변의 유목 부족은 물론 여진인(女眞人)과 한인(漢人) 등 정주민들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여 많은 수의 부족을 송막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뿐만 아니라 변경지역에 거주하던 다수 한인들이 거란 영내로 도망해오기도 하여, 이들 정주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건설한 성곽은 아보기의 경제적 근거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군사·경제 실력을 바탕으로 907년 카간에 즉위하였다. 즉위 후 911년과 912년, 913년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질랄부(迭剌部)의 부족민은 물론 형제들에게도 반발을 받았으나, 곧 8부대인(八部大人)을 연회로 초대하여 모두 살해한 뒤 916년 요(遼)를 건국하고 스스로 '천황제'라고 칭하였다. 태조(太祖)-야율아보기(재위,916~926)-는 요련씨(遙輦氏)를 대신하여 질라부(迭刺部)의 무리로써 임황(帶海)에서 일어나 황도(皇都)를 건설하였다. 분류:거란의 군주 분류:복성 분류:요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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