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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베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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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베리우스 [Tiberius, 정식 이름은 Tiberius Caesar Augustus, 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본명은 Tiberius Claudius Nero. BC 42. 11. 16~ AD 37. 3. 16 나폴리 근처 카프레아이(카프리)]는 제2대 로마의 황제(AD 14~37 재위)이다. 그는 로마 시대의 역사가 타키투스를 비롯, 많은 사가들에게 폭군이라는 말을 들어온 황제이다. 티베리우스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 아님에도 황제가 된 후, 원로원과 대립하며 무시했고, 아우구스투스의 핏줄 일부를 유폐, 처형했으며, 등극 초기 군사반란까지 겪은 악명높은 황제다.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아의 세번째 남편으로 선택한 이는티베리우스였다. 예수는 1세기 유대인이었다. 그는 티베리우스 시저치세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았고 본디오 빌라도 에게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그가 이룩한 제국의 제도와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말년에 폭군적인 은둔생활을 하면서 로마의 중요 인물들에게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1. * 넘겨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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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베리우스 [Tiberius, 정식 이름은 Tiberius Caesar Augustus, 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본명은 Tiberius Claudius Nero. BC 42. 11. 16~ AD 37. 3. 16 나폴리 근처 카프레아이(카프리)]는 제2대 로마의 황제(AD 14~37 재위)이다. 그는 로마 시대의 역사가 타키투스를 비롯, 많은 사가들에게 폭군이라는 말을 들어온 황제이다. 티베리우스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 아님에도 황제가 된 후, 원로원과 대립하며 무시했고, 아우구스투스의 핏줄 일부를 유폐, 처형했으며, 등극 초기 군사반란까지 겪은 악명높은 황제다.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아의 세번째 남편으로 선택한 이는티베리우스였다. 예수는 1세기 유대인이었다. 그는 티베리우스 시저치세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았고 본디오 빌라도 에게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그가 이룩한 제국의 제도와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말년에 폭군적인 은둔생활을 하면서 로마의 중요 인물들에게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아들과 이름이 똑같은 티베리우스의 아버지는 고위 제사장이며 행정관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의 함대 지휘관을 지냈다. 그의 어머니인 리비아 드루실라는 남편과 사촌이었으며 티베리우스를 낳았을 때 13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에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아버지 티베리우스는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충성을 바쳤다. 카이사르의 조카손자이며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결별하여 뒤이은 권력투쟁에서 그를 패배시키자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그 가족은 도망자가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시칠리아로 달아났다가 나중에 그리스로 갔으나 티베리우스가 3세였을 무렵에 사면령이 내려 로마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BC 39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황제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했다. 당시 둘째 아들을 임신하고 있던 리비아의 미모에 이끌려 아우구스투스는 역시 임신중이던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 압력을 넣어 리비아를 포기하도록 만든 뒤 그녀와 결혼했다. 어린 티베리우스는 아버지한테 남았으며 몇 개월 뒤 동생인 드루수스가 태어나자 동생도 아버지에게로 보내졌다. 아버지가 죽을 당시 티베리우스는 9세였기 때문에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리비아와 황제에게로 가서 함께 살았다. 그는 미남이 아니었다. 그의 코는 로마인에게 전형적인 뚜렷한 매부리코였다. 그는 행동거지가 서툴렀으나 부지런했다. 티베리우스가 15세가 된 BC 27년에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의 전초기지를 시찰하러 가면서 티베리우스와 그의 사촌인 마르켈루스를 데리고 갔다. 그들은 전투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변경을 다스리는 법과 요새를 튼튼하게 꾸리는 법, 수비대의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법 등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돌아와서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에게 자기 딸 율리아를 아내로 주었다. 뒤이어 티베리우스도 결혼했다. 제정시대 로마에서 연애결혼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연애결혼을 했다.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사위이며 부관인 마르쿠스 아그리파의 딸이었다. 그는 부인과 동생 드루수스를 사랑했으나 그외에도 중요한 일에 매달렸다. 그는 22세의 나이에 최초로 군대의 지휘를 맡아 수십 년 전 파르티아에서 잃어버렸던 일부 로마 군단의 기지를 되찾음으로써 갈채를 받았다. 그 보상으로 그는 또다른 실전 지휘권을 요구하여 아드리아 해안의 판노니아 속주를 평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행복한 시절은 점차 종말로 다가갔다. 그가 사랑하는 동생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원정에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동생한테서 640㎞ 떨어진 지금의 밀라노 남쪽 포 강변의 티키눔에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 그는 드루수스가 죽기 직전에 도착했다.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시체를 로마로 호송해오면서 줄곧 행렬의 선두에서 걸어왔다. 그는 또한 사랑하는 아내인 빕사니아도 포기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율리아가 미망인이 되자 황제는 그녀를 아그리파(빕사니아의 아버지이며 티베리우스의 장인)와 결혼시켰다. BC 12년에 아그리파도 죽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그녀의 3번째 남편으로 택했다. 티베리우스는 황제의 명에 따라 빕사니아와 이혼하고 율리아와 결혼했다. 티베리우스의 새 아내 율리아는 방탕하다는 평판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율리아가 티베리우스와 결혼했을 때 그는 30세였고 그녀는 27세로 5명의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었다. 율리아는 행실이 좋지 않았으나 황제가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비난하면 티베리우스가 상처를 입을 위험이 있었다. 좋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자 티베리우스는 로마를 떠나 전투지휘를 자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한번은 전투 중간에 로마에 왔다가 친구집에서 우연히 빕사니아를 만났다.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한 원로원 의원과 재혼했다. 티베리우스는 슬픔에 사로잡혀 울면서 그녀를 뒤쫓아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소문을 듣고 그에게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많은 영예를 내려주었지만 그것들이 율리아의 행동을 보상해주지는 못했다. BC 7년에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의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그 직후에 율리아를 로마에 남겨놓고 자진해서 로도스 섬으로 유배생활을 떠났다. 결국에 리비아는 율리아의 숱한 간통의 증거를 잡아서 아우구스투스에게 고했고 그는 대단히 진노했다. 그의 법률에 따르면 그녀는 반드시 처형되어야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판다테리아라는 작은 섬으로 그녀를 평생 동안 유배보냈는데 그 와중에도 티베리우스를 불러오지 않았다. 당시 황제가 후계자로 점찍은 듯한 3명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모두 율리아의 아들들이었다. 그중 하나인 포스투무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미움을 사서 어머니와 함께 유배지로 쫓겨났다. 다른 2명인 루키우스와 가이우스는 황제의 지위를 계승할 후보자들이 분명했다. 그러나 BC 2년에 루키우스가 마실리아(마르세유)에서 죽자 황제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티베리우스를 다시 로마로 불렀다. AD 4년에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모든 영예를 다시 누렸는데 그해에 가이우스가 리키아에서 전투중에 살해당했다. 티베리우스는 로마의 제2인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아들로 입양시켰다. 티베리우스는 남은 사람 중에서 가장 반대할 점이 적은 후계자 감이었다.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최고의 지위에 서게 된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책략을 써서 거의 1개월 가까이 원로원이 자신을 황제로 지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9월 17일에 그는 원수직을 계승했다.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황제 재위 티베리우스의 재위 초기는 지혜롭고 절제된 통치의 모범으로 보이지만 힘과 무력의 과시도 있었는데 그것은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치들을 제외하면 티베리우스의 법률과 정책은 참을성 있고 거시적인 것들이었다. 그는 새롭게 커다란 정복사업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이유 없이 군대를 이동시키거나 속주 총독을 교체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 제국의 재정낭비를 중단시켜 그가 죽을 무렵에는, 물려받은 재산의 20배를 남겨놓았고 로마의 권력을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시켜 놓았다. 그는 해군을 강화했고 검투사 경기를 벌이는 관습을 없앴다. 그러나 이따금 전쟁이나 야만적 폭압이 벌어지기도 했다. 티베리우스의 군단은 한 속주의 반란을 상당히 잔인하게 벌이면서 진압했다. 유대인 4명이 한 여인의 재물을 훔치려고 모의했다는 구실로 유대인 전체를 로마 밖으로 추방했다. 티베리우스의 재위 초기에 벌어진 일 중 가장 해롭고 타당성이 없는 현상은 고발 풍습이 점점 늘어난 것이다(→ 색인 : 델라토르). 23년에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가 죽었다. 그는 특별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으로 티베리우스는 슬픔에 잠겼다. 그후 그는 제국의 사업에 대해 더욱 관심이 줄어들었고 근위대 사령관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는 세야누스에게 실권을 위임했다. 오래지 않아 티베리우스는 단지 명목상의 황제가 되었다. 27년에 67세의 나이로 티베리우스는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남부지방을 방문했다. 중도에 그는 카프리 섬에 들러 멈추었다. 그의 의도는 잠시 머물려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후 그는 로마에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보낸 10여 년의 생애로부터 괴물 티베리우스의 전설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결코 미남이 아니었던 티베리우스는 갈수록 용모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추해졌던 듯하다. 이무렵 그는 정신이상 증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현실세계와 접촉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세야누스를 강력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31년에 그는 5번째로 자신이 로마 콘술(집정관)에 선출되게 만들고 공동집정관으로 세야누스를 택했다. 그는 세야누스가 자기 아들의 미망인인 리빌라와 결혼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이제 세야누스는 권력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에게 바치는 황금상이 건립되고 그의 출생일은 공휴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그를 두려워하고 불신하게 되었다. 세야누스의 후임으로 근위대 사령관이 된 마크로의 도움을 얻어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고발하고 그의 처형을 요구하는 편지를 몰래 원로원에 보냈다. 원로원은 충격을 받고 당황했지만 순응했다. 그것은 아마도 티베리우스의 비난이 정당한 것이기 때문이었거나 근위대의 막강한 위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명백히 티베리우스는 이제 그의 생애의 남은 6년간 지속된 고발과 고문과 처형 행각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공포정치의 와중에서 그의 델라토레스와 고문기술자들은 그의 아들 드루수스가 리빌라와 세야누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증거를 그에게 알려주었다. 로마의 많은 중요 인사들이 거짓이든 아니든 연루되었고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카프리 섬의 누구도 안전하지 못했다. 로마 제국에 대해 티베리우스의 남은 관심사는 자기가 가고난 뒤 누가 통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실질적인 권리를 갖는 살아 있는 후계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처럼 바람직하지 못한 가운데 가장 무해한 후계자를 골랐다. 그가 선택한 인물은 가이우스 카이사르였다. 그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고 그가 군대의 귀염둥이였을 때 로마 군단이 그에게 붙인 칼리굴라, 또는 꼬마장화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를 그의 양자 및 후계자로 지명했다. 37년 봄에 티베리우스는 한 제전의 경기에 참여하여 투창을 던져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어깨를 삐는 부상을 입고 운반되었으나 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후계자인 칼리굴라를 부르러 사람이 파견되었고 근위대는 새 황제에 대한 지지를 선포했다. 전세계에 제위계승의 소식이 전해진 와중에 티베리우스는 의식을 회복하고 일어나 앉아서 먹을 것을 요구했다. 로마의 명망가들은 혼란에 빠졌으나 오직 근위대 사령관인 마크로만이 제정신이었다. 다음날 그는 티베리우스를 담요로 질식시켜 죽였다. 1. * 넘겨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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