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는 굴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일찌기 굴원은 초회왕때 좌도(左徒) 벼슬에 있었는데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역대의 치란(治亂)에 밝아 회왕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굴원이 회왕의 명을 받아 초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헌령(憲令)을 기초하고 있었는데 굴원과 왕의 은총을 다투던 상관대부 늑상이 그걸 가로채어 자신의 공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굴원은 이를 거절하였다. 늑상은 이에 굴원을 회왕에게 참소하였다. "굴원을 학식이 빙자하여 믿고 대왕을 업신여기며 무엇인가 딴마음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현명치 못한 회왕은 늑상의 말을 믿고 굴원을 멀리하였다. 굴원은 왕의 듣고 보는 것이 총명하지 않고 참소와 아첨이 임금의 밝음을 가로막는 것을 금심하고 비통해하면서 장편의 시를 지어 그의 울분을 토로하니 이 시가 유명한 굴원의 이소(離騷)이다. 이 이소라는 주제의 뜻에 대하여는 두가지 설이 있다. '이(離)'는 '이(罹)'와 같은 뜻으로 병이나 재앙에 걸린다는 뜻이고 '소(騷)'는 근심을 뜻하는 것이므로 '근심을 만난다'는 뜻이라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후한 때 왕일(王逸)의 견해로 '이(離)'는 이별의 뜻이므로 '이별을 근심한다'라는 뜻이라는 설인데 앞의 설이 유력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굴원은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친제파였다. 당시 초나라는 굴원의 반대파인 친진파가 득세하고 있었는데 이들 친진 세력들은 진나라의 장의가 6백리의 땅을 베어 주겠다는 미끼에 속아 제나라와 친교를 끊은 후 끊임없이 진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고 초나라가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르게 되자 회왕은 다시
이소는 굴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일찌기 굴원은 초회왕때 좌도(左徒) 벼슬에 있었는데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역대의 치란(治亂)에 밝아 회왕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굴원이 회왕의 명을 받아 초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헌령(憲令)을 기초하고 있었는데 굴원과 왕의 은총을 다투던 상관대부 늑상이 그걸 가로채어 자신의 공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굴원은 이를 거절하였다. 늑상은 이에 굴원을 회왕에게 참소하였다. "굴원을 학식이 빙자하여 믿고 대왕을 업신여기며 무엇인가 딴마음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현명치 못한 회왕은 늑상의 말을 믿고 굴원을 멀리하였다. 굴원은 왕의 듣고 보는 것이 총명하지 않고 참소와 아첨이 임금의 밝음을 가로막는 것을 금심하고 비통해하면서 장편의 시를 지어 그의 울분을 토로하니 이 시가 유명한 굴원의 이소(離騷)이다. 이 이소라는 주제의 뜻에 대하여는 두가지 설이 있다. '이(離)'는 '이(罹)'와 같은 뜻으로 병이나 재앙에 걸린다는 뜻이고 '소(騷)'는 근심을 뜻하는 것이므로 '근심을 만난다'는 뜻이라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후한 때 왕일(王逸)의 견해로 '이(離)'는 이별의 뜻이므로 '이별을 근심한다'라는 뜻이라는 설인데 앞의 설이 유력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굴원은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친제파였다. 당시 초나라는 굴원의 반대파인 친진파가 득세하고 있었는데 이들 친진 세력들은 진나라의 장의가 6백리의 땅을 베어 주겠다는 미끼에 속아 제나라와 친교를 끊은 후 끊임없이 진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고 초나라가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르게 되자 회왕은 다시 굴원을 불러들여 다시 등용하려고 하였다. 굴원은 오직 조국 초나라에 공헌하겠다는 일념으로 수도인 영으로 돌아왔으나 재차 녹상의 참소를 입어 강남지방으로 추방되는 비운에 처해졌다. 굴원은 상수(湘水)가를 방황하면서 웅혼(雄渾)의 시 [천문(天問)]을 써냈다. 172가지 문제를 제기하여 비통한 울부짖음으로 천지에 의문을 호소하였다. 굴원이 상수가에 이르러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못가로 다니며 침음(沈吟)하니 그의 모습은 아주 파리하고 수척해 있었다.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닙니까?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그러자 초췌한 안색으로 있던 굴원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맑다.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있다. 그래서 이곳으로 쫓겨난 것이다." 어부가 다시 물었다. "사물에 구속받지 않고 세상의 추이에 몸을 맡기며 사는 것이 성인이 취할 방도라 들었습니다. 세상이 혼탁하다면 어째서 자신은 같이 취하시지 않으십니까? 가슴속에 주옥을 품었으면서도 왜 스스로 피할 방법을 찾지 않았습니까?" 굴원은 다시 대답하였다. "얼굴을 씻고는 모자의 먼지를 털고, 의복도 간추려 입지 않는가? 결백한 몸을 그런 때로서 더럽힐 수가 없다. 차라리 그럴 바엔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어찌 세속에 몸을 더럽힐 수가 있겠는가?" 굴원은 이런 가운데서도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한시도 잊은 일이 없었다. 경양왕 19년(B.C. 280) 초나라는 지금까지의 친진 정책에서 180도 전환하여 반진 정책을 펴 여러 제후의 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반진 동맹을 재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진나라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한북(漢北)과 상용(上庸)의 땅을 빼앗고 다음해에는 또 서릉(西陵)을 빼앗았다. 경양왕 27년(B.C. 278)에는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드디어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키고 선왕의 무덤인 이릉(夷陵)을 불태워버리니 경양왕은 진성(陳城, 하남성)으로 후퇴하였고 다음해에는 다시 초나라의 무(巫)와 금중을 점령하니 이곳은 초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일찌기 회왕이 진나라에 억류당하면서까지도 끝끝내 내놓지 못하겠다고 버티던 요충지였는데 이제 진나라가 무력으로 빼앗아 버린 것이다. 굴원은 이 소식을 듣고 조국의 앞날에 실망한 나머지 분연히 '애영과 회사(懷沙)의 시'를 짓고 음력 5월 5일 돌을 품고 멱라수(호남성 상수의 지류)에 몸을 던져 순국(殉國)하니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애국 시인이었던 굴원은 중국 시가의 세계에서나 중국인의 생활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 역대의 위대한 시인--이백(李白)과 두보(杜甫)도 예술. 품격. 덕성면에서 굴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호남성 도강현에 있는 굴원에 얽힌 고적의 하나인 천문대 구지는 지금까지 완전히 보전되어 있으며, 투신 자살한 멱라수 가에는 그의 무덤과 사당이 세워져 있다. 굴원이 죽은 음력 5월 5일은 속칭 단오절(端五節)이라 하여 그를 추모하는 제일(祭日)로 정해져 있다. 매년 이날이 되면 강남 지방의 사람들은 뱃머리에 용의 머리를 장식한 용선(龍船)의 경주를 성대히 벌이고 갈대잎으로 싼 송편을 멱라수 물고기에게 던져 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물속에 잠긴 굴원이 고기에게 뜯어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놀이라고 한다. 단오절에 송편을 만드는 일은 전국적으로 펴져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으며 이같은 풍습은 중국에서뿐 아니라 멀리 일본. 말레이시아 등 여러 나라에까지 전승되고 있다. null null nu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