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석구추(昔仇鄒)는 석탈해의 아들이며 신라의 각간이였다. 그의 아들이 제9대 벌휴 이사금이다. 석탈해 이사금의 아들인 석구추 이사금이 왕위를 물려받아 다스리고 있었다. 신라는 포항. 장기곶, 울산, 경주 일대를 차지하고 배를 띄워 대마도의 일부와 ― 일본 혼슈(本州. 본주) 섬의 서북쪽인 ― 시마네(島根. 도근), 돗토리(鳥取. 조취) 현(縣), 양자강 하류인 절강성 동부 해안지대를 식민지로 삼았다.(말할 것도 없이 남해안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갔고 계절풍과 해류의 도움을 받았다) 또 침미다례(백제에 복속한 뒤 이름이 탐라로 바뀜)와 교역하고 임나 가라를 비롯한 가야 연맹과 ― 물길을 놓고 ― 자주 대립했으며 진한 전체를 통합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바로 그 때 서나벌의 대군이 북쪽에서 쳐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파사 거서간이 이끄는 서나벌군은 지금까지 자리잡았던 땅보다 더 동쪽에 있으며 가야 연맹과 멀리 떨어져 있고 낙동 정맥이 가로막아 훨씬 안전한 땅인 경주에 눈독을 들였다. 정맥을 넘은 서나벌군은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있던 신라를 쳐 도읍지를 무너뜨렸고 파사 거서간은 신라의 도읍이던 땅에 새 성을 쌓은 뒤 도읍을 상주에서 경주로 옮겼다(서기 101년). 나라의 중심지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새 도읍지는 달처럼 생긴 언덕에 지어진 성이라고 해서 월성(月城)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후 오랫동안 신라의 도읍이자 중심지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나라 자체를 한꺼번에 옮긴 서나벌(서라벌)이 맨 먼저 한 일은 주변의 세력을 하나하나 병합해 안정을 다지는 일이었다. 파사 거서간은 도읍을 월성으로 옮긴 지 한 해 만에 음즙벌국(경주 강서면 일대)을 병합했고(서기 102년) 이를 본 실직곡국(강원도 삼척)과 압독국(경산)이 - 음즙벌국처럼 당하지 않으려고 - 스스로 서나벌에 항복해 왔다. 물론 이런 항복은 진심이 아니어서 3년 후에는 실직국이 서나벌의 지배를 반대해 들고 일어났고(서기 104년), 거서간은 서나벌군을 보내 실직국을 깨 부수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경주 남쪽으로 옮겼다. 거서간은 압독국도 실직국처럼 들고 일어날까 두려워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한(서기 105년)지 1년 만에 몸소 압독에 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돌아오는 등 민심에 신경을 썼다(서기 106년). 그 해 가을, 어느 정도 민심이 다져졌다고 본 거서간은 다시 마두성주에게 가야를 치라고 명령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 거서간은 비지국(경상남도 창녕), 다벌국(대구), 초팔국(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를 쳐 이를 병합해, 적어도 경상북도에서는 신라가 차지했던 땅보다 더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서기 108년).분류:각간 분류:구수 분류:현무 분류:탈해 분류:석구추 구추(九秋)는 가을철의 약 90일 동안을 이르는 말이다. 음력 9월을 ‘가을’이란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구추방해살 (九醜妨害殺)은 아홉 구 (九), 추할 추 (醜), 방해할 방 (妨), 해칠 해 (害)자를 쓰고, 9가지 이상의 추한 일로 인해 매사에 방해를 받거나 다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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