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만(畢萬)은 주문왕의 15번째 아들 필공(畢公)의 후예다. 필공 고(高)의 원래 성은 주왕실과 동성인 희(姬)다. 무왕이 은주(殷紂)를 멸한 후에 필공을 필에 봉했다. 필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서북쪽으로 필원(畢原)이다. 그래서 후손들은 그들의 성을 필로 삼은 것이다. 그 후예들은 필공의 기업과 봉읍을 지키지 못하고 서민으로 전락하여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춘추 때 필만이 당진국의 관리가 되었다가, 주혜왕 16년 기원전 661년 군우(軍右)라는 중책을 맡아 진헌공(晉獻公)이 위국(魏國)을 정벌할 때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위헌공이 새로 얻은 위국(魏國)의 땅에 필만에게 하사하여 그 대부에 봉했다. 위국은 지금의 산서성 예성에 있던 제후국으로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그 종족을 봉했다. 시경 위풍(魏風)의 위는 이곳을 지칭한다.
필만(畢萬)은 주문왕의 15번째 아들 필공(畢公)의 후예다. 필공 고(高)의 원래 성은 주왕실과 동성인 희(姬)다. 무왕이 은주(殷紂)를 멸한 후에 필공을 필에 봉했다. 필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서북쪽으로 필원(畢原)이다. 그래서 후손들은 그들의 성을 필로 삼은 것이다. 그 후예들은 필공의 기업과 봉읍을 지키지 못하고 서민으로 전락하여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춘추 때 필만이 당진국의 관리가 되었다가, 주혜왕 16년 기원전 661년 군우(軍右)라는 중책을 맡아 진헌공(晉獻公)이 위국(魏國)을 정벌할 때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위헌공이 새로 얻은 위국(魏國)의 땅에 필만에게 하사하여 그 대부에 봉했다. 위국은 지금의 산서성 예성에 있던 제후국으로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그 종족을 봉했다. 시경 위풍(魏風)의 위는 이곳을 지칭한다. 필씨는 봉지 였던 위(魏)를 성으로 삼았다. 필만의 후손 위주(魏犨)가 나라에서 쫓겨나 19년 동안 유랑했던 진문공을 따라다니며 모셨다. 진문공이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르자 군우(軍右)에 올르고 후에 다시 대부로 봉해져 위 땅을 다스렸다. 위주의 아들에 위과(魏顆)와 위강(魏絳)이 있었는데 모두 위나라의 명장이었다. 위과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고사로 전해진다. 진문공 원년 기원전 636년 위씨들의 봉지에 대한 치소(治所)는 곽(霍)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안읍으로 옮겨졌다. 곽은 지금의 산서성 곽주(霍州) 서다. 주정왕(周定王) 23년, 기원전 446년 위사(魏斯)가 군주의 자리에 올라 안읍을 위나라의 도성으로 삼았다. 위사가 위문후(魏文侯)다. 주위열왕(周威列王) 23년 기원전 403년 한(韓)과 조(趙) 양가와 함께 주왕의 책봉을 받아 제후왕의 대열에 섰다. 주안왕(周安王) 25년, 기원전 376년 한조(韓趙) 양가와 함께 삼가가 진(晉)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삼분하여 위나라를 건국했다. 역사상 그 사건을 삼가분진(三家分晉)이라 한다. 이로써 중국은 칠웅(七雄)이 세력을 다투는 전국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필만을 위나라의 선조라고 한 것이다. 분류:위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