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충현 [Wei Chunghsien, 魏忠賢 1568~ 1627]은 중국 명말(明末)의 환관이다. 이진충(李進忠)이라고도 한다. 만력제의 사후에도 태창제 는 즉위후 곧바로 급사하여 천계제 는 총신인 환관 위충현 에게 국정을 위임하는 등 정정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희종(熹宗;天啓帝)의 신임을 얻은 환관 위충현(魏忠賢)은 공포정치를 단행하여 동림당을 탄압하였다. 위충현이 3천 명의 '환관부대'를 조직했는데 위충현은 궁궐 안에서도 말을타고 다니며 이들을 훈련시켰다. 1624년 위충현은 천계제를 설득하여 섭정에 맞먹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는 궁정을 다스리는 환관 부대를 고용하고 나라 전체에 걸쳐 첩보망을 만들었다. 지방에는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중앙정부에는 파렴치한 기회주의자들로 가득 찼다. 한편 동림당 (東林黨)은 유교적 이상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정부개혁에 몸바친 관료집단이었는데, 이들이 위충현에게 반대하자 그는 동림당을 지지하는 수많은 관리들을 처형하거나 관직에서 쫓아냈다. 위충현의 악행에 숨을 죽이고만 있던 조정대신들은 동림당을 중심으로 위충현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위충현 [Wei Chunghsien, 魏忠賢 1568~ 1627]은 중국 명말(明末)의 환관이다. 이진충(李進忠)이라고도 한다. 만력제의 사후에도 태창제 는 즉위후 곧바로 급사하여 천계제 는 총신인 환관 위충현 에게 국정을 위임하는 등 정정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희종(熹宗;天啓帝)의 신임을 얻은 환관 위충현(魏忠賢)은 공포정치를 단행하여 동림당을 탄압하였다. 위충현이 3천 명의 '환관부대'를 조직했는데 위충현은 궁궐 안에서도 말을타고 다니며 이들을 훈련시켰다. 1624~27년 명나라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여,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관료계급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그를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권력을 쥐었던 환관으로 평가한다. 그는 후에 명나라의 천계제(天啓帝:1620~27 재위)가 된 주유교(朱由校)의 어머니를 모시는 집사로서 환관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주유교의 유모와 밀착한 뒤 그녀의 도움을 받아 황자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15세에 제위에 오른 천계제는 국정을 돌보기보다는 목공일을 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어쨌든 그는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 이때문에 위충현은 황실을 장악하여 실질적인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1624년 위충현은 천계제를 설득하여 섭정에 맞먹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는 궁정을 다스리는 환관 부대를 고용하고 나라 전체에 걸쳐 첩보망을 만들었다. 지방에는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중앙정부에는 파렴치한 기회주의자들로 가득 찼다. 한편 동림당 (東林黨)은 유교적 이상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정부개혁에 몸바친 관료집단이었는데, 이들이 위충현에게 반대하자 그는 동림당을 지지하는 수많은 관리들을 처형하거나 관직에서 쫓아냈다. 위충현의 악행에 숨을 죽이고만 있던 조정대신들은 동림당을 중심으로 위충현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조정에 남은 사람들은 위충현에게 다투어 아첨하는 관료들뿐이었다. 한편 그를 위한 사원들이 세워졌으며, 상서로운 징조들이 나타나면 그의 덕택처럼 여겨졌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생사(生祠)가 세워져 그가 공자에 비유되기도 했다. 그러나 1627년 천계제가 죽자 위충현은 권력을 빼앗겼고, 새로운 황제에 의해 파직당한 뒤 재판을 피하기 위하여 목을 매 자살했다. 죽은 후 다시 걸형(傑刑: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