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4세 [Ptolemaeos IV Philopator, 기원전 238경~ 205]는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BC 221~205 재위)이다. 영화를 구가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프톨레마이오스 4세(재위 기원전 221-204년)'가 재위하던 무렵부터 점차 쇠퇴하게 된다. 신하들에게 좌우되어 통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통치하는 동안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해왔던 시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이집트인들의 반란도 일어나 국내의 안정이 흔들렸다.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는 술에 취해 사는 방탕한 난봉꾼이며, 소시비우스로 대표되는 악명 높은 신하들에게 완전히 조종을 받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들의 부추김을 받아 그는 자신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숙부와 형제까지 살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휘하에 있던 뛰어난 장군이 변절하는 사건이 있은 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경계선에 있는 이집트의 코엘레시리아는 시리아의 통치자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기원전 218년 협상이 결렬되면서 안티오코스는 다시 진격을 시도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전진 방어선이 무너졌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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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4세 [Ptolemaeos IV Philopator, 기원전 238경~ 205]는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BC 221~205 재위)이다. 영화를 구가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프톨레마이오스 4세(재위 기원전 221-204년)'가 재위하던 무렵부터 점차 쇠퇴하게 된다. 신하들에게 좌우되어 통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통치하는 동안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해왔던 시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이집트인들의 반란도 일어나 국내의 안정이 흔들렸다.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는 술에 취해 사는 방탕한 난봉꾼이며, 소시비우스로 대표되는 악명 높은 신하들에게 완전히 조종을 받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들의 부추김을 받아 그는 자신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숙부와 형제까지 살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휘하에 있던 뛰어난 장군이 변절하는 사건이 있은 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경계선에 있는 이집트의 코엘레시리아는 시리아의 통치자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기원전 219년 셀레우코스 왕조가 일부 해안 도시들을 점령하자 소시비우스를 비롯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신하들은 시리아와의 협상을 늦추며 그 사이에 이집트군을 재정비하고 철저히 훈련하는 전략을 취했다. 시리아의 위협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이집트 원주민들을 보병과 기병으로 징집해 고대 그리스의 방진(phalanx) 전술에 따라 이들을 훈련했다. 기원전 218년 협상이 결렬되면서 안티오코스는 다시 진격을 시도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전진 방어선이 무너졌다. 기원전 217년 시리아 의 가장 남쪽 도시인 라피아에서, 헬레니즘 이집트 왕국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의 군대(7만 5,000명 추정)와 접전을 벌였다. 그의 군대는 6만 8,000명이었다. 기원전 217년 봄 새로 구성된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는 팔레스타인 남부의 라피아에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대와 만났으나 방진 대형을 이룬 이집트 원주민 군대의 도움으로 프톨레마이오스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는 전투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나 소시비우스의 조언에 따라 강화를 맺었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대는 코엘레시리아에서 물러났다. 라피아 전투를 끝낸 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여동생인 아르시노에와 혼인해 BC 210년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을 깨달은 이집트 원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BC 205년에는 반란이 상(上)이집트까지 확산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인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들은 게릴라전을 펼쳤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남쪽에 있는 이웃 왕국들과 평화스러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에게 해에도 몇몇 섬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이 갖고 있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간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다. 시리아에 대해서도 소시비우스가 이 지역의 분쟁에 이집트를 끌어들이려 했으나 마찬가지로 끼어들지 않았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가 대외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외교적인 통찰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방탕한 성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통치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점점 더 총신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기원전 205년 11월경 죽었다. 그의 총애를 받던 신하들은 이 죽음을 비밀로 하다가 약 1년 뒤 왕비인 아르시노에를 살해하고 어린 왕위 계승자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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