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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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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승(李哲承, 1922년 5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호는 소석(素石), 본관은 전의이다. 전라북도 전주출신.전주고등학교와 보성전문(후에 고려대학교)을 졸업했다.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우파인 한국민주당의 학생조직을 맡아 우익학생운동에 앞장섰다. 1946년 1월 7일, 우익을 대표하는 학생들의 총연합체로서 결성된 '반탁전국학생연맹'의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1,2대 국회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고향 전주에 출마하여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제4,5대 민의원을 지냈다. 5.16이후 정치규제에 묶여 정계에 떠나있다가 정계에 복귀, 야당에서 8,9,10대 국회의원을 하면서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제9대 국회부의장,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는등 야당에서 중진의 반열에 올랐다. 70년대에는 "중도통합론"을 제창하여 유신독재에 대한 투쟁을 주장하는 김영삼, 김대중과는 달리 박정희정권과의 타협을 도모하였다. 선명투쟁을 주장하는 김영삼과 1979년 신민당 총재경선에서 중앙정보부의 은밀한 후원을 업고 맞붙었으나, 김대중계가 김영삼을 지원하여 경선에서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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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승(李哲承, 1922년 5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호는 소석(素石), 본관은 전의이다. 전라북도 전주출신.전주고등학교와 보성전문(후에 고려대학교)을 졸업했다.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우파인 한국민주당의 학생조직을 맡아 우익학생운동에 앞장섰다. 1946년 1월 7일, 우익을 대표하는 학생들의 총연합체로서 결성된 '반탁전국학생연맹'의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1,2대 국회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고향 전주에 출마하여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제4,5대 민의원을 지냈다. 5.16이후 정치규제에 묶여 정계에 떠나있다가 정계에 복귀, 야당에서 8,9,10대 국회의원을 하면서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제9대 국회부의장,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는등 야당에서 중진의 반열에 올랐다. 70년대에는 "중도통합론"을 제창하여 유신독재에 대한 투쟁을 주장하는 김영삼, 김대중과는 달리 박정희정권과의 타협을 도모하였다. 선명투쟁을 주장하는 김영삼과 1979년 신민당 총재경선에서 중앙정보부의 은밀한 후원을 업고 맞붙었으나, 김대중계가 김영삼을 지원하여 경선에서 패했다. 신군부 집권 후에는 잠시 정치규제에 묶여 11대 국회에 참여할수 없었으나 12대 국회에서는 당선되어 야당인 신민당소속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직선제 개헌을 위해 선명투쟁을 주장하는 양김씨 틈새에서 여당의 당론과 같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여 "사쿠라"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직선제 개헌이후 벌어진 1988년 13대 총선에서는 다시 고향 전주에서 잔류 신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호남지역을 쉽쓴 이른바 황색바람(김대중의 평화민주당 돌풍)에 휩쓸려 낙선하고 말았다. 이후로 정계 일선을 은퇴하고 각종 우익운동과 친미반북운동에 앞장서면서 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이사,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민족정론소식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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