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꾀꼴성은 물앙성에서 동쪽으로 산능성을 따라 약 1.2km 정도 되는 지점에 있다. 해발 271.4m인 산봉우리를 둘러서 쌓은 전형적인 테뫼식(산정식) 석축 산성이다. 물앙성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산세가 험하고 물앙성에서 취약했던 동쪽과 남쪽의 전망이 좋다. 물한산성과 꾀꼬리성은 백제 시대의 성이라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꾀꼬리성은 '앵리성(鶯里城)'으로, 물한산성은 '수한산성(水漢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둘레는 약 340m이고 평면은 동남쪽으로 살짝 치우친 달걀 모양의 타원형이다. 역시 지형에 따라 협축으로 쌓거나 편축으로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곳 중 가장 높은 성벽은 외벽이 6.5m에 달하여 상당히 높은 편이다. 정상 근처에는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해 물이 고이도록 했던 웅덩이의 흔적이 있으며 건물이나 성문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성의 북쪽 바깥에는 평상시에 사용할 수 있는 용샘이라는 샘이 있어서 지금도 맑은 물이 고인다. 꾀꼴성은 물앙성과 같은 시기에 쌓았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역시 축조 연대는 아직 불확실하며 백제시대로 전해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앵리산성(鶯里山城)’이라 하고 ‘둘레 655척(尺), 높이 7척이며 폐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꾀꼴성도 그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꾀꼬리라는 새와 연결시키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대개 성 이름의 경우 앞에 지명이 붙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괴골[꼴]에 있는 성’이어서 ‘괴꼴성’이라 했는데 자연스럽게 음이 변해서 꾀꼴성으로 부르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다만 ‘괴’는 느티나무가 많아 ‘괴(槐)골’이라 했을 수 있지만 고양이의 고어인 ‘괴’인지 또 다른 어떤 말이 음이 변해서 괴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백제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 꾀꼴성은 능선으로 연결된 서쪽을 제외하고는 주변 전망이 좋다. 1970년대까지도 인근 학교의 학생들이 소풍을 오기도 했고 주변 여러 마을의 주민들이 봄철에 이 성에 놀러 와서 ‘화류(가무)’를 하며 즐겼다. 성 안 바위 아래에 굴이 있어서 불을 때면 백석포 강(바다) 한 가운데에서 연기가 난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이 굴을 ‘호랭이 굴’이라고도 한다. 최근에는 꾀꼴성 200m 동쪽으로 굴이 뚫린다. 배방-음봉간 4차선 도로를 개설하면서 이 산줄기 아래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 오누이 전설 전해져 전국 각지의 인접한 산성에 많이 전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오누이 전설이 전해진다. 성 아래 마을에 살던 오누이가 성을 쌓는 시합을 하는데 아들(또는 오라비)이 물앙성을 쌓고 딸이 꾀꼴성을 쌓았다. 아들이 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어머니가 딸에게 콩을 볶아 주어 설사가 나도록 했기 때문에 결국 아들이 물앙성을 먼저 완성해서 이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약간 다른 이야기는 아들에게는 밥을 지어주고 딸에게는 콩을 볶아줘서 빨리 먹지 못한 딸이 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결과는 같은데, 시합에 진 딸이 분해서 치마에 담아 옮기던 돌들을 쏟아 붓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때 쏟아놓았다는 돌들이 지금도 그대로 흩어져 있으니, 성 아래 돌이 많은 곳을 ‘광대너덜’이라고 한다. - 꾀꼴성은 전방지휘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물앙성과 꾀꼴성은 같은 시기에 축조했을 것으로 본다. 모두 인근 산자락에서 옮겨온 자연석을 이용해 쌓았다. 꾀꼴성은 물앙성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축조했을 것으로 본다. 전망이 좀 더 좋기 때문에 지휘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하지만, 아마 보조적 역할이었을 것으로 본다. 꾀꼴성에서는 물앙성이 잘 보이지 않지만 물앙성에서는 꾀꼴성이 뚜렷하게 보인다. - 무명산성과 연결 물앙성은 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4km 정도의 위치에 있는 무명 산성(음봉 신수리, 염치 동정리), 그곳에서 다시 서북서로 직선거리 약 4.2km 지점에 있는 영인 산성과 연결된다. 남쪽으로는 직선거리 약 2.5km 위치에 있는, 현충사 뒤 방화산 정상에 위치한 백암리 산성과 연결된다. 꾀꼴성은 서쪽의 물앙성, 그리고 북북동으로 직선 거리 약 3.2km 지점에 있는 연암산 봉수대 및 연암 산성,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5km 위치에 있는 호산리 산성과 연계된다. - 삼국시대 백제가 축조 아산시 지역의 많은 산성들 중에서 백제초기의 대두 산성과 탕정 산성 축조 기록 외에는 전하는 자료가 거의 없어서 정확한 위치나 축조 시기를 알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몇 개의 성은 백제 초기부터 축조되었을 것이고, 상당수는 삼국간의 항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백제 사람들이 처음 쌓았을 것으로 본다. 고구려의 남하로 인한 5세기 웅진 천도 이래로 아산시 지역은 국경 지역으로 고구려를 막는 최전방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6세기 신라와의 세력 다툼 시기에도 마찬가지였고, 통일전쟁 시기 신라와 당의 대립 지점으로 군사적 전략 요충지로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었다. - 위기 때 산성에서 거주 예전의 전쟁 때에는 ‘청야입성(淸野入城)’이라는 것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마을에서 살다가 전쟁으로 긴박한 상황이 되면 마을과 들(식량을 주지 않기 위해 들판의 곡식을 없앤다는 의미)을 비우고 산성에 들어가서 장기전을 펼치거나 적이 지칠 때를 기다려 나가 싸우는 것이다. 공격보다는 방어가 유리했기 때문에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화포가 발달하기 전 시기에 전쟁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래서 많은 산성들이 만들어지고 계속 수축을 하면서 유지 관리를 했던 것이며, 우리 지역의 산성들도 대개 그러하였다. 물론 성을 쌓을 때의 노역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고단한 것이었다. 백제의 고성가도는 지역의 옛 고성을 연결해 옛성을 따라 백제의 역사와 삶을 체험하고 자연을 느낄수 있는 코스로 구성됐다. 천안 위례 산성→연기 운주 산성→공주 공산성→논산 노성 산성→부여 부소 산성→서천 건지 산성→보령 남포 읍성→태안 안흥 산성→서산 해미 읍성→홍성 홍주성→청양 우산성→예산 임존성→아산 영인 산성과 꾀꼴산성 등 13개 시·군 494㎞를 잇는 구간이다. 분류:아산의 산성 분류:앵커 분류:꾀꼬리 분류: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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