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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연(金俊淵, 아호는 낭산(朗山), 1895년 ∼ 1971년 12월 31일)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본관은 김해이다. 전라남도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김상경(相逕)의 9형제 중 장남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다. 1914년 영암보통학교, 1917년 경기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일본 오카야마(岡山) 제6고등학교(대학예과과정), 1921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독법과(獨法科)를 거쳐, 이듬해 같은 대학 대학원 정치학과의 조수로서 일하였다. 1922년∼1924년에는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정치와 법률학을 연구하였다. 이후 영국 런던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54년 고향인 영암에서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제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55년 동아일보사 중역 및 민주당 상무위원을 거쳐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피선되어, 유엔 한국대표도 지냈다. 1957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통일당을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제4·5대 의원이 되고, 1960년 부통령에 출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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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김준연(金俊淵, 아호는 낭산(朗山), 1895년 ∼ 1971년 12월 31일)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본관은 김해이다. 전라남도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김상경(相逕)의 9형제 중 장남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다. 1914년 영암보통학교, 1917년 경기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일본 오카야마(岡山) 제6고등학교(대학예과과정), 1921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독법과(獨法科)를 거쳐, 이듬해 같은 대학 대학원 정치학과의 조수로서 일하였다. 1922년∼1924년에는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정치와 법률학을 연구하였다. 이후 영국 런던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김준연은 한국 최초의 해외 특파원(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1925년의 소련을 시찰했고 조선일보 논설위원, 전 조선공산당 당수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1926년부터 민족주의자의 통합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였고, 1927년에는 보성전문학교의 강사로서 교단에도 섰다. 1927년 《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안재홍·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홍명희·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2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 제3차공산당사건(세칭 ML당사건)에 관련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 후 1934년 동아일보에서 주필을 지냈다. 1936년 손기정(孫基禎)의 일장기말살사건에 관련되어 사임한 뒤, 광복 때까지 경기도 전곡에서 해동농장(海東農場)을 관리하였다. 또한 흥업구락부사건, 조선어 학회 사건 등을 주동하여 국내에서는 가장 격렬한 항일투쟁을 벌였고, 8년의 투옥 생활과 9년 동안의 연금생활을 하였다. 일제 시대 당시 김창숙과 함께 항일 세력의 양대 산맥이었으며. 일제가 가장 경계하고 감시하는 0순위 인물이였다. 이 일화가 입증하듯 낭산은 국민들로부터 인기와 신망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며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일본은 1945년 8월 11일 경기도지사 이쿠다를 통하여 조선의 자본가, 지주, 명사 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송진우를 접촉하여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중경 임시정부 봉대(奉戴)와 연합군의 승인을 이유로 대면서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4일 송진우와 가까운 김준연에게도 부탁했으나, 김준연은 송진우의 참여 없이는 응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것 역시 무산되었다. 이후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국민대회 준비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 민주의원(民主議院)의원과 한국민주당 상무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낭산은 한민당 부당수 겸 선전부장으로 있으면서 제헌국회 의원, 헌법기초위원이 되어 직접 대한민국의 헌법을 작성했고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힘썼다. 1948년 고향인 영암에서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재임시,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 상임당무위원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때는 조병옥 내무장관과 함께 빈약한 장비로 무장한 경찰 병력과 함께 대구 사수에 임했고, 1·4후퇴 때 법무장관으로서 안전한 철수를 위한 계획을 입안하기도 했다(참고로, 이때 대구는 백선엽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미 8사단 10연대, 미 25사단 27연대, 국군 8사단 10연대가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내어 지켜냈다). 1954년 고향인 영암에서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제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55년 동아일보사 중역 및 민주당 상무위원을 거쳐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피선되어, 유엔 한국대표도 지냈다. 1957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통일당을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제4·5대 의원이 되고, 1960년 부통령에 출마하였다. 5·16 군사정변이후 김준연은 8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7차에 걸쳐 군사정권세력을 향해 폭탄연설을 하여 군사정권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1963년 자유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 되고, 1967년 민중당 총재로 대통령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독립노선 獨立路線》(1947)·《나의 소전(小傳)》(1957)·《나의 길》(1966)·《나의 편력(遍歷)》(1969) 등이 있다.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3년 대통령표창(건국공로훈장)을, 1969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고 1971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0분에 서울 성동구 금호동 자택에서 타계했다. 영결식은 1972년 1월 7일 서울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렸고,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천주교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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