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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Georg Friedrich Handel, Handel,1685년 2월 23일(독일) ~ 1759년 4월 19일]은 후기 바로크 시대 독일 태생 영국의 작곡가이다. 특히 오페라, 오라토리오, 기악 음악으로 유명하며 대표작으로는 오라토리오 〈메시아 Messiah〉(1741), 부수 음악인 〈수상 음악 Water Music〉·〈왕궁의 불꽃놀이 Music for the Royal Fireworks〉(1749)가 있다.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은 성공한 외과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루터교 목사의 딸이었다. 헨델이 음악에 재능을 보이자 가족은 그의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할레에서 훌륭한 세속 음악과 교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아버지가 작센-바이센펠스 공작의 궁정 외과의로 있었던 바이센펠스 근처 궁정에서 연주되는 음악도 들을 수 있었다. 할레에서 그는 리프라우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이자 그 마을 성가대의 지휘자였던 작곡가 F.W. 차호프의 제자가 되어 그에게 건반악기 연주법과 작곡을 배웠으며 다른 선생에게 오보에와 바이올린도 배웠다. 당시 그가 작곡한 오보에 소나타가 지금도 남아 있다. 1696년 베를린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의 재능은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선제후비 조피 샤를로테의 주목을 받았다. 헨델이 11세 때 아버지가 죽었지만 그에 대한 교육은 지속되었으며 1702년에는 법학도로서 할레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간 그는 음악 경험을 넓히고 생활비의 일부분을 충당하기 위해 할레에 있는 개혁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으며, 행운의 기회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북쪽의 함부르크로 갈 때까지 1년 동안을 그곳에서 봉사했다. 함부르크와 이탈리아에서의 활동 함부르크에서 헨델은 오페라 관현악단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들어갔다. 함부르크 오페라단 감독의 권유로 하프시코드 연주자의 역할도 맡았으며 1705년에는 첫 오페라인 〈알미라 Almira〉의 초연을 관장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그는 더 많은 작품들을 위촉받았는데, 그때 작곡된 〈네로 Nero〉(1705)·〈플로린도 Florindo〉·〈다프네 Daphne〉(1706)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이 당시 이탈리아는 유럽 음악의 중심지였으며 돈을 벌어 성공하려는 야심만만한 작곡가들은 이탈리아로 가서 공부했다. 헨델의 이탈리아 대장정은 큰 성공을 거두어 음악적 표현 및 사회적 혜택을 누렸다. 그는 피렌체·로마·나폴리·베네치아에 머물렀는데, 그 체류기간은 각각 달랐다. 피렌체에서 작곡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를 만났으며 1707년에는 그곳에서 첫번째 이탈리아어 오페라인 〈로드리고 Rodrigo〉를 작곡했다. 〈로드리고〉의 공연으로 헨델은 로마에 있는 중요한 예술 후원자로부터 격찬을 받았는데 그에 대한 답례로 그는 로마로 가서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당시에 작곡된 그의 작품 가운데는 이탈리아어로 된 독주 칸타타(성악 음악), 2중주, 규모가 큰 칸타타 〈Il trionfo del tempo e del disinganno〉(1708), 라틴어 교회음악과 오라토리오 〈부활 La Resurrezione〉이 있다. 로마에서 나폴리로 건너간 헨델은 그곳에서 세레나타(극적 칸타타) 〈Aci, Galatea e Polifemo〉(1708. 6)와 흥미로운 프랑스어 노래들, 스페인 혹은 포르투갈 출신인 돈나 라우라와의 연애에서 비롯된 〈스페인 칸타타 Cantata Spagnuola(No se enmenderá jamás)〉를 작곡했다. 1709년 12월 26일에는 오페라 〈아그리피나 Agrippina〉를 베네치아에서 초연했는데 그 초연은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헨델은 독일에서 명성을 떨쳤지만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완전히 습득함으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의 친구인 아고스티노 스테파니(교황의 순회 대사이며 그때까지 하노버 궁정의 음악감독이었음)를 통하여 하노버의 공작 에르네스트 아우구스투스를 만났는데 그는 헨델에게 스테파니의 직위를 제의했다. 헨델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공식적으로는 1716년까지 하노버의 음악감독으로 있었지만 거의 그 자리를 비웠다. 1710년초에 하노버에 도착해서 그해 가을 런던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의 활동 1711년초에 오페라 〈리날도 Rinaldo〉가 런던에서 공연되어 큰 호응을 얻자 헨델은 영국에서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며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년 후 선제후로부터 잠시 동안의 체류를 허락받은 그는 런던으로 돌아와 〈충실한 양치기 Il Pastor fido〉·〈테세오 Teseo〉를 공연했다. 1713년에는 〈여왕의 생일을 위한 송가 Ode for the Queen's Birthday〉와 위트레흐트 평화조약을 축하하는 〈위트레흐트 테 데움 Utrecht Te Deum〉·〈유빌라테 Jubilate〉를 작곡하여 왕실의 총애를 얻었으며 앤 여왕으로부터 매년 200파운드를 받았다. 영국의 귀족과 지식인들로부터 한 사람의 인간 음악가로서 인정받고 존경받았던 헨델로서는 서둘러 하노버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1714년에 여왕이 죽고 선제후 조지 루이스가 영국의 국왕 조지 1세가 되자 더욱더 그러했다. 10월 26일에 국왕과 그의 가족은 왕실 부속 예배당에서 헨델의 음악을 들었다. 그 무렵 헨델은 국왕이 된 선제후의 충복으로 하노버를 다시 방문했다. 독일에 있는 동안 그는 함부르크에도 들렀는데 1715년에는 그곳에서 〈리날도〉가 공연되었으며 바르톨트 하인리히 브로케스의 작품에 곡을 붙인 〈수난곡 Passion〉(1716)은 1717년 이후 계속 연주되었다. 그는 독일의 다른 도시에도 머물렀다. 1718년에 헨델은 섄도스 공작의 음악감독이 되었는데 섄도스 공작의 궁전이 있는 캐넌스는 런던에서 조금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헨델은 시인인 존 게이의 〈Acis and Galatea〉(〈Aci, Galatea, e Polifemo〉와는 다른 작품)에 곡을 붙인 〈섄도스 앤섬 Chandos Anthems〉과 〈하먼과 모데케이 Haman and Mordecai〉를 작곡했다. 이것은 헨델의 마지막 작품으로(영국의 풍자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쓴 가사와 프랑스의 극작가 장 라신의 〈에스더 Esther〉에서 가져온 가사에 의함), 영국 오라토리오 의 실질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확실한 입지를 갖게 된 헨델은 브룩가에 집을 샀는데 이 집은 그의 남은 여생 동안 안식처가 되었다. 1726년 헨델은 영국 국민이 되었고, 이로 인해 왕실 부속 예배당의 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 이 직위에 있으면서 많은 음악을 작곡했는데 그 가운데는 1727년에 작곡한 〈조지 2세의 대관식 앤섬 Coronation Anthems for George Ⅱ〉과 1737에 작곡한 〈캐롤라인 여왕의 장례식 앤섬 Funeral Anthem for Queen Caroline〉이 있다. 1720~28년 킹스 시어터에서는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 의해 오페라들이 상연되었는데 이곳의 음악감독이었던 헨델은 공연되는 오페라의 대부분을 작곡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 비록 그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들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그 오페라들은 천차만별의 성공을 누렸다. 존 게이의 풍자적인 〈거지 오페라 Beggar's Opera〉가 센세이션을 일으킨 후 1728년부터 이탈리아 오페라의 미래가 점점 불확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헨델은 계속해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최고의 음악형식이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수지맞는 사업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이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1729년 다시 한번 유럽 대륙을 방문했다. 그가 데리고 있던 몇몇 인기 있는 이탈리아 가수들의 변덕과 불확실한 대중들의 기호에도 불구하고 헨델은 1741년까지 계속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그때까지 40여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오페라는 런던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쇠퇴기를 맞았는데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윤리관을 가진 가수들이 저속한 가사로 노래하는 이 오락 형식을 영국인들이 용납하지 못한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오페라가 쇠퇴하게 되자 오라토리오가 점점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후 음악감독, 흥행사, 작곡가, 하프시코드와 오르간 연주의 대가로서, 시대 조류에 민감한 교사로서 전력을 다했으며 1737년에는 뇌일혈로 추정되는 가벼운 발작을 일으키면서 몹시 앓았다. 엑스라샤펠에서 회복된 후에는 여왕의 죽음으로 슬픔을 맞았다. 여왕의 장례식을 위해 독일의 코랄 선율을 사용하여 작곡한 우울한 앤섬은 12월 17일에 대중들 앞에서 연주되었으며 1주 후에는 왕실 예배당에서 왕족들을 위해 사적으로 연주되었다. 그후 헨델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의 가장 매력적인 희극 오페라의 하나인 〈세르세 Serse〉가 제작되었고 오르간 협주곡 작품 4가 출판되었으며 보다 소규모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사울 Saul〉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Israel in Egypt〉을 작곡했다. 그리고 죽은 음악가들을 위한 기금(지금의 왕립음악가협회) 설립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그가 이탈리아 오페라로부터 이탈한 사실은 1739, 1740년에 영국의 시인 존 드라이든의 〈성녀 세실리아 축일을 위한 송시 Ode for St. Cecilia's Day〉, 존 밀턴의 〈쾌활한 사람 L'Allegro〉·〈사색하는 사람 Il Penseroso〉 등에서 영어 가사를 사용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1740년에 헨델은 합주 협주곡 작품 6과 2번째의 오르간 협주곡들을 출판했다. 그 한 해 동안 오페라의 쇠퇴에 따른 반응으로 노선 변경을 심각하게 고려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로 인해 낙담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전환기에 아일랜드의 총독 데번셔 공작으로부터 더블린 자선기관을 위한 음악을 맡아달라는 초청을 받은 헨델은 침체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과연 그답게 부진을 털어버린 그는 창작에 몰두하여 8월 22일부터 9월 14일 사이에 예약된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초고를 완성했다. 1개월 뒤에는 〈메시아〉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 작곡된 〈삼손 Samson〉이 이미 사보사의 손에 넘겨졌다. 11월에 몇몇 연주자들을 동반하고 체스터를 가는 도중에 더블린에 들른 헨델은 그곳 성당 음악가들의 도움을 얻어 사적으로 〈메시아〉를 시연했다. 12월 23일 더블린에서 예약 연주회를 시작했으며 1742년 4월 13일에는 〈메시아〉가 초연되었다. 이 공연은 청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6월 3일에 재공연되었다. 여름 동안 아일랜드에 머물면서 헨델은 〈숲의 음악 Forest Music〉을 포함한 소품들의 모음곡을 재편집했다. 다음 3년 동안의 작품들로는 오라토리오 〈요셉과 그의 형제들 Joseph and His Brethren〉(1744 초연)·〈Belshazzar〉(1745), 세속 오라토리오 〈세밀 Semele〉(1743)·〈허큘리스 Hercules〉(1745),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중 데팅겐 전투에서 거둔 프랑스군에 대한 영국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데팅겐 테 데움 Dettingen Te Deum〉(1743) 등이 있다. 그러나 1745년에는 건강이 더 나빠졌는데 그와 동시대인 한 사람은 그가 〈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의 공연에서 "하프시코드는 연주하지 않고 풀이 죽어 창백하고 어두운 안색"을 보였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메시아〉 이후 10년간은 헨델의 경력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오라토리오와 대규모 합창곡을 영국의 가장 대중적인 음악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다. 1740년대 중반에 '방종'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위대한 오라토리오는 도덕적 타락이 점점 커져가는 데 대한 일종의 보호벽이라는 생각이 퍼져갔다. 이러한 정의감은 1749년 이후 〈메시아〉가 특히 기아 양육원과 결부되면서 확산되었다. 그 병원의 후원자이면서 1750년부터 총재직에 있었던 헨델은 1754년까지 이곳 부속 교회에서의 〈메시아〉 연주를 감독했다. 말년 헨델의 자비심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관심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그에게 깊은 애정을 품도록 했다. 심지어 그의 음악은 국민적 인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그러한 분위기를 감지하는 그의 능력은 〈왕궁의 불꽃놀이〉에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1749년에 있었던 슐레지엔 전쟁의 종전을 상징하고 있다. 복스홀 가든에서 있었던 리허설에는 1만 2,000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1750년 여름 마지막으로 독일을 방문한 헨델은 네덜란드에서의 마차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 회복한 그는 마지막 오라토리오 〈입다 Jephtha〉를 작곡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이 작품을 쓰는 동안(1751년 2월 13일 악보를 적으면서) 그의 눈에 문제가 생겨 눈 수술을 받았다. 완전히 눈이 멀지는 않았지만 말년의 작품 창작에 있어 심각한 지장을 받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입다〉는 1752년 2월 26일 런던의 코벤트 가든 극장(그곳에서 오라토리오가 자주 연주됨)에서 연주되었다. 그때부터 계속 사순절 오라토리오 시즌은 열렬히 환영받았다. 헨델은 연주에 참여하여 때로는 오르간으로 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사실상 영국 국민들에게 널리 존경받는 명사가 되었다. 헨델은 죽을 때까지 음악 활동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았다. 1759년 4월 20일 그가 죽자 위대한 작곡가이며 한 인간으로서 세인의 존경을 받았던 위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3,000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의 시인 묘역에 묻혔다. 명성 살아 있는 동안 영국에서 대예술가로서의 위상을 인정받았던 헨델은 인간으로서나 예술가로서 평생 동안 그 명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다른 음악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존재였다. 젊은시절 그는 귀족 후원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았으며 어느 정도 이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그와는 다른 견해와 기호가 형성되어 있던 영국에서 그는 보다 폭넓은 대중들의 요구에 봉사하고 이를 표현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음악을 민주화했으며, 그런 면에서 대중적인 오라토리오, 가곡, 인기 있는 기악곡들은 순전히 음악적인 중요성을 뛰어넘는 또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헨델 음악은 영국 문화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것이다. 독일에서도 헨델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증대했다. 작품 연주와 비평을 통해 독일에서도 독일 민족 작곡가로 재확립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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