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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형왕(仇衡王,Guhyeong 재위 : 521년 음력 4월 7일 ~ 532년 혹은 562년) 혹은 구해왕(仇亥王), 구충왕(仇衝王)은 금관 가야의 마지막 왕이다. 아버지는 겸지왕이며, 어머니는 각간(角干) 출충(出忠)의 딸인 숙(淑)이다. 521년 겸지왕이 돌아가고,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이 즉위하였다. 522년 대가야 이뇌왕이 신라에 청혼하였다. 522년에 가야의 구형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자, 법흥왕이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 조에 보면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 김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금관 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562년 음력 9월 신라 진흥왕 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온다. 삼국사기도 가야가 반함에 왕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야를 정벌하였으며 이때 사다함(斯多含)의 전공이 가장 컸다. 수백년 전해오던 구형왕 영정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누군가에 의해 도난을 당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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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구형왕(仇衡王,Guhyeong 재위 : 521년 음력 4월 7일 ~ 532년 혹은 562년) 혹은 구해왕(仇亥王), 구충왕(仇衝王)은 금관 가야의 마지막 왕이다. 아버지는 겸지왕이며, 어머니는 각간(角干) 출충(出忠)의 딸인 숙(淑)이다. 521년 겸지왕이 돌아가고,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이 즉위하였다. 522년 대가야 이뇌왕이 신라에 청혼하였다. 522년에 가야의 구형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자, 법흥왕이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 조에 보면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 김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금관 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562년 음력 9월 신라 진흥왕 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온다. 삼국사기도 가야가 반함에 왕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야를 정벌하였으며 이때 사다함(斯多含)의 전공이 가장 컸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의 이름은 세종(世宗), 무도(茂刀), 무득(茂得)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이름과 표기가 다르다. 삼국 사기에는 금관 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 대접하고 왕에게는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하였다고 하였다. 아들 무력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각간(角干)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김유신은 무력의 손자이며 금관 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진골 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성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산청군 금서면의 '구형왕릉’은 후기가야 대맹주인 구형 대왕의 능이라고 알려졌다. 밤머리재 뒤로 우뚝선 봉우리가 동왕등재로 가는 도토리봉이다. 동왕등재는 구형왕이 항전할때 깃대를 세워 깃대봉으로도 불리운다. 왕등재는 인근의 왕산 기슭 구형왕릉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서낭당처럼 돌무더기로 쌓은 왕릉이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소재 가락국(駕洛國)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의 돌무덤(石塚)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는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백년 전해오던 구형왕 영정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누군가에 의해 도난을 당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설은 또 있다. 나라가 망하려 하자 구형왕은 지리산으로 피해 들어와 천연 요새인 국골에서 도성을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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