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읍성성지(靈山 邑城城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59호이다. 창녕군 영산면 성내리의 읍성이다. 읍성은 지방의 관청과 민가를 보호하고, 군사적 .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성을 말한다. 이곳에 읍성을 언제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나라의 읍성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활발하게 축조되었던 시기는 왜구의 침략이 찾았던 조선 초기였다. 원래 읍성은 내륙 지방에는 쌓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 영산은 고려 말부터 낙동강을 거슬러온 왜구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던 곳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읍성 역시 이전의 흙으로 쌓은 토성을 조선 초기에 돌로 다시 쌓았을 가능성이 크다. ‘영산읍지’에 의하면, 성은 둘레 약 1.15km, 높이 5m로 선조 때 쌓았으나 허물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 때는 일본의 침략을 예감하였고 전국의 성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는데, 그때에 이 성도 다시 수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길이 106m, 높이 2.5m, 폭 15m 정도이다.
영산 읍성성지(靈山 邑城城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59호이다. 창녕군 영산면 성내리의 읍성이다. 읍성은 지방의 관청과 민가를 보호하고, 군사적 .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성을 말한다. 이곳에 읍성을 언제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나라의 읍성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활발하게 축조되었던 시기는 왜구의 침략이 찾았던 조선 초기였다. 원래 읍성은 내륙 지방에는 쌓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 영산은 고려 말부터 낙동강을 거슬러온 왜구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던 곳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읍성 역시 이전의 흙으로 쌓은 토성을 조선 초기에 돌로 다시 쌓았을 가능성이 크다. ‘영산읍지’에 의하면, 성은 둘레 약 1.15km, 높이 5m로 선조 때 쌓았으나 허물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 때는 일본의 침략을 예감하였고 전국의 성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는데, 그때에 이 성도 다시 수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길이 106m, 높이 2.5m, 폭 15m 정도이다. 이 성은 거대한 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작은 돌들을 정교하게 쌓아올렸다. 지금은 시가지와 경작지가 들어서 대부분이 붕괴되고, 성안의 연못도 메워져 버렸다. 1930년대까지는 성안에 관아를 비롯한 옛 건물이 남아 있었는데 이후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다만 태자봉 아래의 계곡에서 성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설치한 수구가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조선시대 읍성에서 필요한 물을 어떻게 확보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