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간(比干)은 극간을 하다가 능지처참을 당하고 은나라는 결국 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지게 되었다. 비간은 은나라 태정대왕(太丁大王)의 둘째 아드님이고 주왕의 숙부(叔父)이다. 은대의 삼인이란 은나라 말기에 활약한 세 사람으로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 칭한 것이다. ‘미자(微子)’ ‘비간(比干)’‘기자(箕子)’가 있었다. 은나라 말에 주왕은 말을 안 듣는다고 만삭의 임산부를 찔러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은나라에 비간(比干)이라는 충직한 왕자가 있었다. 주왕을 암살하려는 신하들의 계획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고 은나라의 미자, 비간, 기자(箕子), 세 성인 중에 기자는 미친척하며 자신을 숨겼고 비간(比干)은 정신 차리라고 죽음을 각오한 간언을 하다가 걸려들었다. 주왕은 비간을 죽이고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 감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비간의 어진 마음과 은나라에 대한 충심이 누구보다 강함을 알고 비간의 묘를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후에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묘 앞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비간(比干)은 극간을 하다가 능지처참을 당하고 은나라는 결국 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지게 되었다. 비간은 은나라 태정대왕(太丁大王)의 둘째 아드님이고 주왕의 숙부(叔父)이다. 은대의 삼인이란 은나라 말기에 활약한 세 사람으로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 칭한 것이다. ‘미자(微子)’ ‘비간(比干)’‘기자(箕子)’가 있었다. 은나라 말에 주왕은 말을 안 듣는다고 만삭의 임산부를 찔러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은나라에 비간(比干)이라는 충직한 왕자가 있었다. 주왕을 암살하려는 신하들의 계획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고 은나라의 미자, 비간, 기자(箕子), 세 성인 중에 기자는 미친척하며 자신을 숨겼고 비간(比干)은 정신 차리라고 죽음을 각오한 간언을 하다가 걸려들었다. 주왕은 비간을 죽이고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 감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비간의 어진 마음과 은나라에 대한 충심이 누구보다 강함을 알고 비간의 묘를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후에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묘 앞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임씨 시조와 관련한 기록에는 비간의 부인이 죽지 않고 산 속에 피하였다가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주나라가 건국(建國)되자 무왕(武王)이 비간공의 아들 천을 찾아 임씨(林氏)의 성과 견(堅)이라는 이름을 사(賜)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이 때문에 비간의 아들인 임견(林堅)은 임씨(林氏) 성(姓)의 시조(始祖), 비간(比干)은 태시조(太始祖)로 여겨진다. 평택임씨세보에 따르면 은나라 왕자 비간의 아들 견이 장림산에 은거하였기에 성을 임이라 하였다. 비간(比干)공의 부인 진씨가 목야 장림산 석실에서 아들(泉)을 낳은바 주나라 무왕이 장림산에서 낳았다 하여 성은 임씨로 이름은 견(堅)으로 정해주어 그때부터 임씨 성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분류:은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