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거란 문자를 사용하다가 1119년 태조가 완안희윤(完顔希尹: Wanyan Xiyin)을 시켜 여진 대자를 만들고 1138년 희종임금이 스스로 소자를 만들고 1145년 이후에는 이를 널리 사용하였다.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창제한 거란의 문자 거란 대자와 거란 소자 그리고 금나라 황족 완안희윤에 의해 창제된 여진 문자 이 두 문자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금 태조는 통치상 피요에 의하여 완안희윤(完顔希尹)에게 거란 문자를 여진어에 적용시킨 여진문자를 만들게 하고, 희종 때에는 소자를 만들어 여진 고유의 것을 보전하려고 힘썼다. 서로군은 을실(乙室) 발극렬 종한(宗翰)을 좌부원수(左副元帥)로 임명하였고 경략사(經略使) 완안희윤(完顔希尹)을 우도감(右都監)으로 임명하여 태원(太原)을 공격하게 했다. 요를 침공하여 중경(中京 대정부(大定府)를 말한다)을 점령하니 연희가 운중(雲中)으로 달아났는데, 완안희윤과 종한(宗翰)이 다시 서경(西京 운중을 말한다)을 탈취하였다. 종한이란 자의 본명은 점몰갈(粘沒喝)이다. 분류:문자 발명자
처음에는 거란 문자를 사용하다가 1119년 태조가 완안희윤(完顔希尹: Wanyan Xiyin)을 시켜 여진 대자를 만들고 1138년 희종임금이 스스로 소자를 만들고 1145년 이후에는 이를 널리 사용하였다.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창제한 거란의 문자 거란 대자와 거란 소자 그리고 금나라 황족 완안희윤에 의해 창제된 여진 문자 이 두 문자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금 태조는 통치상 피요에 의하여 완안희윤(完顔希尹)에게 거란 문자를 여진어에 적용시킨 여진문자를 만들게 하고, 희종 때에는 소자를 만들어 여진 고유의 것을 보전하려고 힘썼다. 서로군은 을실(乙室) 발극렬 종한(宗翰)을 좌부원수(左副元帥)로 임명하였고 경략사(經略使) 완안희윤(完顔希尹)을 우도감(右都監)으로 임명하여 태원(太原)을 공격하게 했다. 요를 침공하여 중경(中京 대정부(大定府)를 말한다)을 점령하니 연희가 운중(雲中)으로 달아났는데, 완안희윤과 종한(宗翰)이 다시 서경(西京 운중을 말한다)을 탈취하였다. 종한이란 자의 본명은 점몰갈(粘沒喝)이다. 분류:문자 발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