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곡 성주 공직은 연산 매곡(충청북도 보은)사람으로 신라말의 혼란기에 스스로 장군을 칭했다가 890년대말 양길이 청주,충주일대를 장악하자 그 수하로 들어갔다가 899년 비뢰성 전투에서 양길이 궁예에게 대패하고 이듬해 궁예가 이 지역을 접수할때 그의 세력으로 들어간다. 그후 궁예는 기존 패서호족의 대안으로 청주를 선택, 청주인들을 대거 철원으로 이주시키고 군부에 청주 인사들을 배치시켰는데 청주와 지리상으로 가까웠던 공직은 매제인 경종을 철원으로 보내 중앙에 연줄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면서 궁예가 등용한 청주 인사들은 날벼락을 맞게된다. 이때 청주 출신으로 순군리로 있던 임춘길이 역모를 도모하다 복지겸에게 적발되어 죽었는데 경종도 이에 연류되어 합께 잡혀죽었다. 이에 공직과 청주세력은 반기를 들었으나 왕건은 유금필과 홍유에게 1500을주어 보내는 바람에 반란세력의 중심이던 진성과 선장이 척결된다. 다급해진 공직은 장자 공직달, 차자 공금선 및 딸을 백제에 볼모로 보내고 그대로 백제에 투항해버렸다. 이런식으로 매곡의 비롯하여 중북부의 요지들이 후백제에 넘어가면서 아직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왕건은 한동안 줄곧 밀리는 신세가 된다.
매곡 성주 공직은 연산 매곡(충청북도 보은)사람으로 신라말의 혼란기에 스스로 장군을 칭했다가 890년대말 양길이 청주,충주일대를 장악하자 그 수하로 들어갔다가 899년 비뢰성 전투에서 양길이 궁예에게 대패하고 이듬해 궁예가 이 지역을 접수할때 그의 세력으로 들어간다. 그후 궁예는 기존 패서호족의 대안으로 청주를 선택, 청주인들을 대거 철원으로 이주시키고 군부에 청주 인사들을 배치시켰는데 청주와 지리상으로 가까웠던 공직은 매제인 경종을 철원으로 보내 중앙에 연줄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면서 궁예가 등용한 청주 인사들은 날벼락을 맞게된다. 이때 청주 출신으로 순군리로 있던 임춘길이 역모를 도모하다 복지겸에게 적발되어 죽었는데 경종도 이에 연류되어 합께 잡혀죽었다. 이에 공직과 청주세력은 반기를 들었으나 왕건은 유금필과 홍유에게 1500을주어 보내는 바람에 반란세력의 중심이던 진성과 선장이 척결된다. 다급해진 공직은 장자 공직달, 차자 공금선 및 딸을 백제에 볼모로 보내고 그대로 백제에 투항해버렸다. 이런식으로 매곡의 비롯하여 중북부의 요지들이 후백제에 넘어가면서 아직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왕건은 한동안 줄곧 밀리는 신세가 된다. 왕건은 어떻게든 이 지역을 탈환해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928년 7월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매곡 인근의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한다. 그러나 930년 고창 전투로 승세는 고려로 기울고 이를 잘 관찰하고있던 공직은 '망해가는 나라, 완전히 망할때까지 계속 잊느니 곧 이길 편에 붙자' 는 생각으로 932년 아들 공영서와 함께 다시 고려에 투항해버린다. 왕건은 유동적이었던 보은, 청주, 문의 등 중서부지역의 쟁패에 우위를 점할수 있게되었다는 생각에 지난날의 배신을 추궁하기는 커녕 그의 아들 중 공함서를 좌윤으로 임명하고 귀족 준행의 딸을 공영서에게 시집보내게 하며 크게 환대했다. 견훤은 그가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노하여 공직달, 공금선과 딸을 잡아다 달군 쇠로 다리 근육을 끊어버려 결국 직달이 죽었으나 그 자신은 좌승 벼슬을 하고 939년 죽을때까지 후한 대접을 받았으며 죽고 나서는 시호를 봉의(奉義) 사공, 삼중 대광 벼슬을 추증받는다. 자신의 가치를 잘 파악하고 변신의 귀재라 할정도로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주인을 바꾸며 결국 난세에 영달을 누린 인물이다. 분류:비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