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숙손통은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사실 신하와의 차이를 찾기 힘들었다. 유방도 평민출신인데다가 전쟁기간 중에는 비록 유방이 제왕이기는 하였지만 장졸(將卒)들과 동고동락하며 서로 간격(間隔) 없이 지내었던 터라, 천하를 평정하였다고 다르게 생각하지 못하였다. 병사들은 유방이 보는데도 술을 마시고 칼을 뽑아 기둥을 치면서 서로 다투기도 하니 황제가 된 유방은 이러한 것이 싫었다. 이를 본 숙손통이 유방에게 유세하였다. ‘공자(孔子)가 탄생하였던 노(魯)에는 유자(儒者)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항상 예(禮)를 내세우니, 전쟁시기에는 함께하기 어렵지만 수성(守成)하는 데는 쓸 모가 있습니다. 제가 산동의 노로 가서 이들을 불러서 조정(朝廷)의 의례(儀禮)를 만들겠습니다.’ 드디어 숙손통은 노에 가서 유자 30여명을 불렀다. 그런데 그 가운데 두 사람이 오지 않으려고 하면서 숙손통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섬긴 사람은 열 명이군요. 모두 얼굴을 마주 하고 아부하여서 그렇게 귀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지금 예악(禮樂)을 일으키겠다고 하니 될 말이요? 천하는 안정되었지만 죽은 사람을 모두 장사지내지 못하였고, 예악을 일으키려면 덕을 쌓으며 100년은 가야 될 것이요. 그러니 나는 못 가겠소.’ 숙손통은 그들이 비루(鄙陋)한 유자(儒者)여서 시대가 변하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 30명을 데리고 서쪽의 장안으로 갔다. 그리고 유방 주위에 있는 학자와 자기 제자까지 합하여 100명과 함께 의례를 만들어 연습하였다. 예컨대 황제가 들어 올 때 신하들이 어떤 모습으로 해야 하는가 등을 정한 것이다. 드디어 한 달이 되자 유방도 직접 황제가 어떻게 거동할 것인지를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는 이 정도면 황제인 자기 자신도 할 만하다고 하였다. 해가 바뀌고 궁궐이 완성되자 조회의 의례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알자(謁者)가 예(禮)를 주관하는데, 신하들이 들어오는 방법, 시위(侍衛)가 늘어 서 있는 방법, 기치를 벌려 놓는 방법, 황제가 경(警)을 전하고 연(輦)을 타고 나오는 법이 모두 시행되었으며, 여러 신하들이 황제를 받들어 축하하는데, 대단히 엄숙하여 떨리고 두렵기까지 하였다. 끝나고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높은 순서에 따라서 황제에게 축수하고, 술잔을 아홉 번 돌린 다음에 알자가 ‘파주(罷酒)’라고 한 마디 하자 모두 술자리를 끝냈다. 이 의례를 집행하는 동안 의례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번번이 어사(御史)가 끌어 내 갔다. 그러니 아무도 감히 옛날처럼 떠들고 예의를 잃는 사람이 없었다. 유방도 만족하였다. 예를 마친 다음에 ‘나는 오늘에야 황제가 귀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이 숙손통의 의례는 율령처럼 기록되었고, 오늘에는 그 흔적만 남아 있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어떤 모습을 해야 되는지의 형식을 만든 것이고, 오늘까지도 동양 사람들의 생활 속에 남아 있다. 사마광도 예(禮)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예(禮)란 사물을 만드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 예가 몸에 배면 동정(動靜)하는 법도가 있게 되고, 집안에서 사용하면 구족(九族)이 화목해지고, 향당(鄕黨)에서 사용하면 장유(長幼)의 질서가 생기며 군신(君臣)간에 사용하면 서열이 생겨서 정치가 완성된다고 하였다. 후대에는 숙손통이 만든 의례에 관하여서는 최고라고 칭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노(魯)에 남아 있던 두 사람까지 모셔다가 제대로 된 의례를 만들지 못하고 의례의 찌꺼기만 훔쳐다가 황제의 총애를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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