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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케(1208년 ~ 1259년)는 몽골 제국의 제4대 칸(재위:1251년~1259년)이고,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구유크 칸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묘호는 헌종(憲宗)이다. 그의 아버지는 톨루이이며 어머니는 소르칵타니로 그의 형제는 쿠빌라이, 아라 부가, 훌라구 등이 있었다. 몽케는 4대 몽골 황제가 되었다. 1251년 몽케 칸이 몽골족의 대칸으로 임명되었고 1255년 훌라구는 몽케의 명을 받들어 대군을 이끌고 서남 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정복에 나섰다. 그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무스타심에게 몽골족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는데 아바스 칼리파가 거부했다. 그는 수십만의 몽골군을 이끌고 바그다드로 진격하여 1256년 12월 알라무트의 아사신 근거지를 파괴하고 거침없이 바그다드로 쳐들어갔다. 바그다드를 포위하자 칼리파 알 무스타심은 자비를 구했으나 소용없었다. 1258년 2월 10일 훌라구는 이슬람군의 항복을 받았고 이슬람군이 무장해제함과 동시에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여 거의 8만명의 바그다드 이슬람교도가 학살당했고 칼리파 알 무스타심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압바스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1259년 고려를 항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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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케(1208년 ~ 1259년)는 몽골 제국의 제4대 칸(재위:1251년~1259년)이고,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구유크 칸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묘호는 헌종(憲宗)이다. 그의 아버지는 톨루이이며 어머니는 소르칵타니로 그의 형제는 쿠빌라이, 아라 부가, 훌라구 등이 있었다. 몽케는 4대 몽골 황제가 되었다. 1251년 몽케 칸이 몽골족의 대칸으로 임명되었고 1255년 훌라구는 몽케의 명을 받들어 대군을 이끌고 서남 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정복에 나섰다. 그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무스타심에게 몽골족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는데 아바스 칼리파가 거부했다. 그는 수십만의 몽골군을 이끌고 바그다드로 진격하여 1256년 12월 알라무트의 아사신 근거지를 파괴하고 거침없이 바그다드로 쳐들어갔다. 바그다드를 포위하자 칼리파 알 무스타심은 자비를 구했으나 소용없었다. 1258년 2월 10일 훌라구는 이슬람군의 항복을 받았고 이슬람군이 무장해제함과 동시에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여 거의 8만명의 바그다드 이슬람교도가 학살당했고 칼리파 알 무스타심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압바스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1259년 고려를 항복시켰다. 이윽고 1259년 몽케 칸의 친정군이 남송으로 원정하였다. 남송의 장군 가사도는 쿠빌라이의 군대를 악주(무창)에서 격파한 공적으로 재상에 등용된다. 이 때 가사도가 대승한 말을 할 수 있던 것은, 몽골의 황제 몽케가 사망했기 때문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는 가사도와 쿠빌라이와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1259년 제4대 대칸인 몽케가 남송 원정 중에 병사하고, 몽골고원에 있던 수도 카라코룸을 수비하던 막내동생 아리크 부케는 몽케파의 왕족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어 서부의 차가타이 가문 등 여러 왕가의 지지를 얻어 대칸의 지위를 얻었다. 이에 몽케와 함께 남송 원정 중이던 둘째동생 쿠빌라이는 윤11월에 군대를 되돌려 내몽골에 들어서 동쪽 3왕가(칭기즈칸의 동생 가계)등의 지지를 얻은 다음, 이듬해 3월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내몽골의 개평부(開平府;훗날의 상도(上都)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지위에 앉았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사성 처음으로 몽골고원 남북에 두 명의 대칸이 들어서게 된다. 몽케의 장례를 치르고, 제도(帝都) 카라코람에서 즉위한 아리크 부케가 대칸으로서의 정통성은 확보한 셈이었으나, 군사력을 장악한 쿠빌라이 역시 아리크 부케를 배신자로 여기고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대칸이라고 주장했다.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양군은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서전인 1261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부케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 산하의 제후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차가타이 가문마저 아리크 부케에 대한 지원을 끊자, 1264년 아리크부케는 결국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이 일련의 전란을 승리자 쿠빌라이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아리크부케의 난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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