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곤오(昆吾)는 하나라 사람이였다. 서기전 3000년 설에는 우리의 조상인 치우(蚩尤)와 곤오(昆吾)가 이리두(二里頭) 청동기 문화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치우는 무기를 만든 사람으로, 곤오는 솥을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홍제 8년에 제곡 고신이 수분하 동쪽으로 침범했을 때 단국의 기풍(己豊) 곤오(昆吾)가 이를 물리쳤다. 홍제는 곤오를 하백으로 삼았다. 홍제는 곤오를 하백으로 삼고 소성(蘇姓)을 내려주었다. 이리하여 기성(己姓)이 소성(蘇姓)이 되었다. 곤오(昆吾)는 하나라를 보좌하여,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룬 뒤에야 작위와 상을 갖추어 받을 수 있었다. 중국의 문헌인 고사고 (古史考)에 “하나라 때 곤오 씨가 기와를 만들었다(夏時昆吾氏作瓦).”라는 옛기록이 있고, 약 3천년 전 주나라 때 사용된 기와가 현재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곤오가 처음 기와를 만들어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어 놓았다. 곤오 지방에서 나는 자철광석으로 만들어진 것을 곤오검이라 하였는데 당시대에 자철광석으로 만든 곤오검은 최초의 철검으로 곤오검을 한번 내려치면 옥돌이 진흙 잘리듯 했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처럼 강도가 강하였다. 성탕은 시위, 원, 곤오(昆吾)같은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특히 곤오국은 하나라 걸왕이 가깝게 생각하였다. 중국의 4대 검문이라 칭하는 검술로는 "곤오, 청평, 순양, 팔선"이 있다. 이 4대 검술은 권술과 달리 개별적으로 발전하여, 이 후 각계 권술 문파에 흡수되어 동종의 이름에 여러개의 변화를 이룬 검술들이다. 하나라 때 곤오 씨가 기와를 만들었다. 한반도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나라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서기전 2, 1세기경이라고 할 수 있다. 풍이(風夷)의 후예(後裔)로 적제 축융(赤帝祝融)의 61세손인 기풍(己豊) 호(號) 곤오(昆吾)께서 동숙신(東肅愼:조선) 불함산(弗咸山:백두산) 북쪽에 소성(蘇城)을 세워 하백(河伯:王)이 되므로 기(己)성을 소(蘇)성으로 개성하여 소씨(蘇氏)가 비로소 생겼으니 소풍공(蘇豊公)이 소씨의 조조(肇祖)이다. 소풍공(蘇豊公:BC2417甲辰年生[단군기원 84년전])은 소성의 하백이시고 태하공(太夏公)이라 칭하였다. 후예(後裔)들이 국토(國土)에 소목(蘇木:槿[무궁화])을 심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약하였고 약 이천(二千)여년 동안 삼소(三蘇) 유소국(有蘇國) 후소국(後蘇國)으로 이어왔다고 환국사 단군고기(桓國史 檀君古記)에 기재되었다. 곤오공의 70세손 소백손은 고조선 수상 소대벌(蘇大閥)의 장남이다. 소백손공(蘇伯孫公:BC240年辛酉生)은 소나라가 망하자 신하(臣下)들을 이끌고 백두대간을 타고 경주(慶州) 형산(兄山)으로 내려와 후진한(後辰韓)의 주(主=王)가 되셨으니 진공(辰公)이라 하며 동근보(東槿譜)에 경주(慶州) 소씨(蘇氏) 시조(始祖)라고 기록되었다. 소벌공(蘇伐公:BC129年壬子生)은 소백손공의 5세손이오 육부(六部) 촌장(村長)중에 수장(首長)인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이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양육(養育)시켜 신라(新羅)를 건국(建國)하셨으니 백공(白公), 또 소도리(蘇都利), 소벌도리(蘇伐都利)라 하였다고 삼국유사 삼국사기 신라사에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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