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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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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3세[Ptolemaeos III Euergetes, (Euergetes는 그리스어로 '은인'이라는 뜻)]는 기원전 264~221년에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아들이며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전성기의 왕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는 BC 246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기원전 246~222 재위)에게 번영하는 왕국을 남겨주었다. 기원전 246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인 오이어게테스▶18가 이집트 왕위에 올랐다.키레네를 재병합(再倂合)하였다. 한편 셀레우코스 왕조와 제3차 시리아 전쟁을 벌여 성과를 거두었다. 기원전 245년 전까지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는 오랜 약혼 기간을 끝내고 키레네의 왕 마가스의 딸인 베레니케 2세와 결혼함으로써 기원전 258년 이래로 분리되어 있던 이집트의 키레나이카를 다시 통합했다. 1. * 넘겨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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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3세[Ptolemaeos III Euergetes, (Euergetes는 그리스어로 '은인'이라는 뜻)]는 기원전 264~221년에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아들이며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전성기의 왕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는 BC 246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기원전 246~222 재위)에게 번영하는 왕국을 남겨주었다. 기원전 246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인 오이어게테스▶18가 이집트 왕위에 올랐다.키레네를 재병합(再倂合)하였다. 한편 셀레우코스 왕조와 제3차 시리아 전쟁을 벌여 성과를 거두었다. 기원전 245년 전까지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는 오랜 약혼 기간을 끝내고 키레네의 왕 마가스의 딸인 베레니케 2세와 결혼함으로써 기원전 258년 이래로 분리되어 있던 이집트의 키레나이카를 다시 통합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2세의 왕비로 갔다가 안티오코스가 죽은 뒤 살해당한 누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지체없이 코엘레시리아에 침입했다. 그 지역 도시들의 반란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해군은 셀레우코스 2세의 군대를 쫓아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까지 밀고들어갔다. 그 와중에 소아시아 반도 해안가에 있는 일부 섬들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기원전 245년경 제지를 받았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는 육군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깊숙이 쳐들어가 바빌론 근처에 위치한 티그리스 강가의 셀레우키아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자료들을 보면 국내에서 소요가 일어나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고 나와 있다. 이와 함께 기근과 나일 강의 수위 저하, 그리고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가 로도스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에 반대해 동맹을 맺은 것도 또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소아시아와 에게 해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체인 아카이아 동맹이 이집트와 동맹을 맺게 했으며, 셀레우코스 왕조가 흑해지역에서 2개의 동맹국을 확보함에 따라 더 한층 열기를 더해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242~241년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물러났고, 이듬해가 되어서야 평화가 찾아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2곳 모두 시리아 지역에 속하는 오론테스 강 유역과 안티오크,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와 트라키아를 가까스로 지켰으며 킬리키아까지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안에서는 아버지가 개발해놓은 알파이윰(오아시스와 비슷한 카이로 남서쪽의 저지대)에 대한 식민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또한 달력을 고쳐 기원전 311년을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원년으로 삼았다. 이집트 사제들의 회의에서 만들어 내놓은 일종의 선언문인 '카노푸스 칙령'은 4년마다 1일을 더하기로 하고 1년의 일수를 365일과 1/4일로 승인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새 달력은 일반인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쓰이지 않았다. 사제들이 남긴 글이나 고대 문헌들을 보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을 때 약탈당한 성상(聖像)들을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시 복구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는 거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신전이 있는 상(上)이집트의 에드푸에 건설 작업을 벌였고 여러 신전에 기부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와 마케도니아를 계속 괴롭히고 있던 전쟁에 말려드는 것은 피했으나 지진으로 황폐해진 로도스 섬에 대해서는 원조를 보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에 대항하려는 스파르타 왕의 계획에 대해서는 BC 222년에 피난처를 제공한 적은 있었으나 지원금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소아시아에서는 그곳에 있는 한 왕국의 왕위 계승자를 자처하며 많은 분란을 선동했던 인물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토에서 망명지를 찾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곧바로 그를 억류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정책은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이집트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선포한 뒤 국내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누리며 최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이집트를 남겨놓고 죽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통치 시대에 대해서는 W. W. 탄의 〈헬레니즘 문명 Hellenistic Civilisation〉(3권, 1952), A. 부셰 르클레르의 〈라기데스가의 역사 Histoire des Lagides〉(1903) 제1권에서 논의되고 있다. 1. * 넘겨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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