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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렉산드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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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렉산드르 2세 [Aleksandr II,(영) Alexander Ⅱ. 정식 이름은 Aleksandr Nikolayevich. 1818. 4. 29(구력 4. 17) 모스크바~ 1881. 3. 13(구력 3. 1)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황제(1855~81 재위)이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II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이다. 헬싱키 대성당 (루터란 대성당 Lutheran Cathedral). 알렉산드르 2세 동상. 헬싱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며, 핀란드 루터파 교회의 총본산이다. 핀란드 헬싱키 시내 한복판에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 동상이 버젓이 서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크림 전쟁중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해방과 지방의회 구성, 사법개혁 등을 시도하였다.비스마르크는 개인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와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음으로써 러시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우호적 관계 정립에도 크게 기여했다. 1885년 3월 13일 : 성당 기사단원이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자에게 암살 당한다. 1. * 넘겨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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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렉산드르 2세 [Aleksandr II,(영) Alexander Ⅱ. 정식 이름은 Aleksandr Nikolayevich. 1818. 4. 29(구력 4. 17) 모스크바~ 1881. 3. 13(구력 3. 1)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황제(1855~81 재위)이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II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이다. 헬싱키 대성당 (루터란 대성당 Lutheran Cathedral). 알렉산드르 2세 동상. 헬싱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며, 핀란드 루터파 교회의 총본산이다. 핀란드 헬싱키 시내 한복판에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 동상이 버젓이 서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크림 전쟁중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해방과 지방의회 구성, 사법개혁 등을 시도하였다.비스마르크는 개인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와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음으로써 러시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우호적 관계 정립에도 크게 기여했다. 1885년 3월 13일 : 성당 기사단원이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자에게 암살 당한다. 자유주의적 교육을 받은 그는 러시아의 후진성을 여실히 드러낸 크림 전쟁의 결과에 고민하던 끝에 방대한 내정 개혁안을 마련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농노해방(1861)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866년부터 억압정책을 채택해 결국 혁명적 테러리즘의 부활과 알렉산드르 자신의 암살을 초래했다. 알렉산드르는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대공(1825년에 황제 니콜라이 1세가 됨)과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니콜라이 대공과 결혼해 러시아 정교회 세례를 받기 전에는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녀였음)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전제적인 아버지의 강한 성격에 눌려 지내 아버지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어머니의 적극적 배려로 인도주의자·자유주의자이며 낭만적인 시인 바실리 주코프스키가 소년 알렉산드르의 윤리의식과 지성 발달을 책임질 가정교사가 되었다. 약간 게으르고 평범한 지능의 소년은 이 스승의 낭만적 감수성을 평생 간직했다. 니콜라이 1세와 주코프스키의 서로 반대되는 영향은 그의 품성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알렉산드르 2세는 백부인 알렉산드르 1세(루소 신봉자이자 공화주의자인 스위스인 가정 교사한테 교육을 받았음)와 마찬가지로 '관대한' 전제군주, 또는 적어도 인도주의적인 전제군주가 될 운명이었다. 크림 전쟁이 한창이던 1855년 2월에 아버지가 죽자 알렉산드르는 36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이 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선진국보다 뒤떨어져 있음을 확연히 보여주었다. 전쟁에 패하자 니콜라이 1세의 억압 정치에 대한 국내의 불신이 높아졌고,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 사이에 과감한 변혁의 욕구가 널리 일어났다. 황제가 '근대화'를 통해 러시아를 서방 선진국과 같은 대열에 올려놓기 위한 일련의 개혁에 착수한 것은 이런 광범위한 욕구의 영향 때문이었다(→ 색인 : 대개혁). 1856년 봄 파리에서 러시아에게 가혹한 강화조약이 체결된 이후 새 황제는 즉위 초기에 교통 수단의 개선에 관심을 두었다. 당시 러시아의 주요 철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를 잇는 것뿐이었다. 알렉산드르가 즉위했을 당시, 전체 철도 길이는 965km도 채 되지 않았으나 그가 죽은 1881년에는 운행구간이 약 2만 2,525km에 이르렀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철도 건설로 말미암아 대부분 봉건적 농업 사회였던 지방의 경제 생활이 전체적으로 촉진되었다. 합자회사가 생겨났고 은행과 신용기관이 발달했다. 러시아의 주요수출품인 곡물 운반도 쉬워졌다. 또다른 근대화 조치인 농노해방도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색인 : 농노제). 지주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한 알렉산드르 2세는 타고난 게으름을 이겨내고 지난한 입법 작업에 직접 적극적으로 참여해 1861년 2월 19일 농노해방령으로 결실을 맺었다. 전제군주가 펜을 한번 휘두름으로써, 움직이는 재산으로 여겨지던 수천만의 농노가 인간으로서 자유를 찾았다. 더욱이 그들은 장기상환 조치로 약간의 땅까지 분배받았다. 이 개혁은 농노를 해방시켜 경제적으로 자생력있는 부농계층을 만든다는 궁극적 목표가 있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안겨준 심리적 충격은 대단해 '프랑스 혁명 이후 최대의 사회 운동'으로 묘사되었고, 러시아 노동 해방의 중요한 단계를 이루었다. 동시에 이 개혁은 이미 흔들리고 있던 러시아 지주 계층의 경제적 토대를 잠식하는 데 이바지했다. 농노제 폐지는 러시아의 고리타분한 행정제도 가운데 몇 가지를 철저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식 사법제도의 심한 악폐는 1864년에 제정된 재판법으로 교정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러시아는 중요한 몇 가지 점에서 서방 국가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사법제도를 갖게 되었다(사실 많은 개별 사항은 프랑스의 사법제도를 본뜬 것임). 지방정부도 1864년 법령으로 재편성되어 선거로 구성되는 자치기구인 '젬스트보'가 창설되었다. 젬스트보의 점진적 도입으로 자치 지역이 확대되고 지방 복지(교육, 위생, 의료, 지방 수공업, 작물 재배)가 개선되었으며, 미개한 러시아 시골 지역에 처음 계몽의 빛이 비추었다. 오래지 않아 젬스트보가 구성된 마을의 학교들은 시골의 문맹퇴치를 강력히 지지했다. 한편 계몽된 육군장관 드미트리 밀류틴은 러시아군 조직의 거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군사 학교의 개선으로 군복무의 교육적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다. 1874년에 제정된 군조직법으로 처음 징병제가 도입, 모든 계층의 젊은이가 군복무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런 개혁들, 그리고 러시아 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사소한 개혁들의 기본 방침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고, 러시아를 봉건제에서 해방시키며, 서구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개혁들의 목표와 결과는 계급 특권의 축소와 인도주의적 진보 및 경제발전이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는 즉위한 순간부터 정치적 '해빙'을 실시했다. 정치범을 석방하고 시베리아 유형자들의 귀향을 허락했다. 인간적으로 관대한 황제는 종교적 소수파, 특히 유대인과 복고신앙파를 법적 무능력자로 처리하던 무거운 제재 조치를 없애거나 완화했다. 외국 여행에 대한 제약도 사라졌다. 중세의 야만적인 형벌은 폐지되었다. 폴란드에 대한 가혹한 지배도 누그러졌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 2세를 자유주의자로 묘사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는 사실 독재 정치의 원칙을 확고히 지지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은 조상한테서 물려받은 천부의 독재 권력을 유지할 의무가 있으며, 러시아는 아직 입헌정부나 대의정부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확신했다. 실제 경험은 이런 확신을 더욱 굳혀주었을 뿐이다. 폴란드에서 러시아가 가혹한 지배를 약간 누그러뜨리자 애국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암살 기도가 끊이지 않았으며 마침내 1863년에는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서방 국가들은 폴란드인들을 위해 이 사태에 개입할 조짐을 보였고 러시아는 이런 위협 속에서 폴란드 봉기를 진압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 황제가 볼 때 더 심각한 것은 러시아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가는 니힐리즘이었다. 이들은 급진적 전단과 비밀 결사를 만들고 혁명 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정부는 1862년부터 경찰력을 동원해 점점 더 강한 억압 조치로 여기에 대응했다. 이런 상황은 1866년 봄 젊은 혁명가 드미트리 카라코조프가 황제를 죽이려 한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알렉산드르는 커다란 위험 앞에서 용감하게 처신해 거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알렉산드르는 완전히 보수주의로 돌아섰다. 그후 8년 동안 영향력을 발휘한 신하는 비밀 경찰 우두머리인 표트르 슈발로프였다. 그는 실제 위험과 가공의 위험으로 끊임없이 주군을 겁먹게 하며 황제에 대해 어느 정도 영향력을 유지해 나갔다. 카라코조프의 암살 미수에 뒤이은 반동기간은 알렉산드르의 사생활에서도 전환점을 이룬 시기였다. 그는 이무렵 예카테리나 돌고루카야 공녀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는데, 노년에 접어든 황제는 젊은 아가씨에게 열정적으로 이끌리게 되었다. 정열을 쏟아부은 연애 관계는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고, 그의 가족(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공녀였던 아내는 6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았음) 내에서뿐 아니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서도 그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더욱이 그는 죄책감 때문에 범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의 압력에 굴복했다(→ 색인 : 범슬라브주의). 이들은 1876년에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시작하자 병약하고 편협한 황후를 대변자로 이용했다. 알렉산드르는 확고한 평화주의자였지만 마지못해 억압받는 슬라브족의 옹호자가 되어 1877년 마침내 투르크에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군은 초기에는 패배했지만 결국 승리를 거두어 1878년초 전위 부대가 투르크 북서부의 마르마라 해변에 진을 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승리로 얻은 주요한 대가(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들에 의해 크게 줄어들었음)는 투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던 불가리아의 독립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불가리아는 아직도 알렉산드르 2세를 '건국의 아버지'로 예우하고, 수도 소피아 한복판에 동상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1877년 전쟁 초기의 군사적 실패에 베를린 회의 때의 상당한 외교적 실패가 겹쳐 러시아는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1879년초에 혁명적 테러리즘이 되살아나 곧 황제 개인을 겨냥했다. 그를 저격하려는가 하면 그가 탄 열차를 탈선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끝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겨울궁전을 폭파하려고까지 했다. 직접적인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운명론을 바탕으로 한 불굴의 용기를 보여 주던 알렉산드르는 내무장관 미하일 로리스 멜리코프 백작에게 임시 독재자로서 최고 권력을 위임했다. 그는 테러리스트 조직(자칭 '인민의 의지')을 뿌리뽑고, 동시에 1866년 이후의 억압 정책 때문에 등을 돌린 온건파를 회유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1880년 황후가 죽자 알렉산드르는 예카테리나 돌고루카야(이미 그녀에게서 3명의 자식을 얻었음)와 은밀히 결혼하고 예카테리나를 그의 배우자로 선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대중이 이 조치를 무리없이 받아들이도록, 결혼한 사실을 발표할 때 입헌주의자들의 열망에 어느 정도 양보하는 조치도 함께 발표할 작정이었다. 여기에는 간접선거로 뽑힌 대의원이 포함되는 2개의 입법위원회를 설치할 계획도 있었다. 로리스 멜리코프 헌법으로 불린 이 법령이 시행되었다면 러시아에서 입헌정치 발달의 씨앗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망설임 끝에 황제가 마침내 포고문에 서명한 바로 그날(1881. 3. 1), 인민의 의지당이 후원한 암살음모가 성공해 그는 폭탄에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알렉산드르는 위인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며 그의 업적은 그의 인간성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대개혁은 사실 표트르 대제나 레닌의 개혁 못지 않게 중요하지만 그의 인품이 사람들에게 준 영향은 표트르 대제나 레닌보다 훨씬 뒤졌다. 역사에서 알렉산드르 황제가 차지하는 자리는 상당히 중요한데 이는 거의 전적으로, 러시아의 발전 단계에서 운명의 갈림길에 놓였던 시기에 이 거대한 제국의 절대 군주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1. * 넘겨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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