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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춘(金龍春) , 문흥왕 김용춘(文興王, ? ~ ?)은 신라의 왕족이자 추존왕으로 제 13대 풍월주이기도 했다. 신라의 제25대 임금 진지왕과 지도 부인(知道夫人)의 아들이며, 신라의 제26대 진평왕의 사위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왕족. 일명 용수(龍樹). 진지왕의 아들.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622년(진평왕 44) 이찬(伊飡)으로 내성사신(內省私臣)이 되었다. 친어머니 지도태후와 함께 궁중에서 자란 용수와 용춘은 어린 시절 진평왕을 아버지로 알고 자랐다. 덕만은 늘 병을 핑계로 용춘에게 천명공주와 가까이 지내도록 했다. 한편, 천명의 마음을 안 마야왕후는 어느 날 궁중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용춘을 불러, 천명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김용수는 화랑세기에 의하면 언제 사망하였는지 명확하지 아니라고 다만 김춘추의 생부로서 죽을 때 동생 김용춘에게 부인이던 천명 공주와 김춘추를 맡겼다라고 한다. 분류:신라의 왕족
- 김용춘은 풍월주이다. 김용춘은 김춘추의 아버지죠..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은 진지왕과 지도 부인사이에 태어났어요. 대부분의 사극에서 김춘추의 아버지를 김용춘 이라고 하고 김용춘 과 김용수 를 다른 이름을 가진 동일 인물이라고 한다. 김용수가 진평왕의 첫째 딸 천명과 결혼을 해서 아들을 하나 낳는다. 그리고 동생 김용춘은 둘째 딸 덕만과 결혼을 하게 되니, 용수와 용춘은 각각 사촌 형의 딸들과 결혼하는 것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당시 집권 세력의 미움을 받은 김용수가 궁 밖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천명공주가 그를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아들을 낳았으나 얼마 뒤 김용수가 죽었고 천명은 김용수의 동생 김용춘과 결혼합니다. 이후 선덕왕이 후계자를 낳으려고 형부 김용춘을 천명에게서 빼앗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자 용춘이 스스로 물러나 천명부인에게 돌아갔다고 합니다. <화랑세기>에는 여왕이 남편을 세 명까지 둘 수 있었고 김용춘을 데리고 살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여 그를 포기하였다고 합니다. 용춘공이 선덕 여왕 덕만이의 첫째 남편이라고 합니다. 비보랑이 지도의 아들 용춘공을 천거하여보리공을 대신하고자 했는데, 만호태후가 들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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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춘은 풍월주이다. 김용춘은 김춘추의 아버지죠..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은 진지왕과 지도 부인사이에 태어났어요. 대부분의 사극에서 김춘추의 아버지를 김용춘 이라고 하고 김용춘 과 김용수 를 다른 이름을 가진 동일 인물이라고 한다. 김용수가 진평왕의 첫째 딸 천명과 결혼을 해서 아들을 하나 낳는다. 그리고 동생 김용춘은 둘째 딸 덕만과 결혼을 하게 되니, 용수와 용춘은 각각 사촌 형의 딸들과 결혼하는 것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당시 집권 세력의 미움을 받은 김용수가 궁 밖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천명공주가 그를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아들을 낳았으나 얼마 뒤 김용수가 죽었고 천명은 김용수의 동생 김용춘과 결혼합니다. 이후 선덕왕이 후계자를 낳으려고 형부 김용춘을 천명에게서 빼앗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자 용춘이 스스로 물러나 천명부인에게 돌아갔다고 합니다. <화랑세기>에는 여왕이 남편을 세 명까지 둘 수 있었고 김용춘을 데리고 살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여 그를 포기하였다고 합니다. 용춘공이 선덕 여왕 덕만이의 첫째 남편이라고 합니다. 비보랑이 지도의 아들 용춘공을 천거하여보리공을 대신하고자 했는데, 만호태후가 들어주지 않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는 이찬(伊飡) 김용춘(金龍春)과 천명부인(天明夫人)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대씨[大氏] - 용춘공의 제 4 부인[夫人] 아버지는 대남보(大男甫) 홍주[紅珠] - 용춘공의 제 6 부인[夫人] 가야파이며 아버지는 비보랑(秘寶郞), 어머니는 덕명공주 김씨(德明公主 金氏)다.
- 김용춘(金龍春) , 문흥왕 김용춘(文興王, ? ~ ?)은 신라의 왕족이자 추존왕으로 제 13대 풍월주이기도 했다. 신라의 제25대 임금 진지왕과 지도 부인(知道夫人)의 아들이며, 신라의 제26대 진평왕의 사위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왕족. 일명 용수(龍樹). 진지왕의 아들.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622년(진평왕 44) 이찬(伊飡)으로 내성사신(內省私臣)이 되었다. 친어머니 지도태후와 함께 궁중에서 자란 용수와 용춘은 어린 시절 진평왕을 아버지로 알고 자랐다. 덕만은 늘 병을 핑계로 용춘에게 천명공주와 가까이 지내도록 했다. 한편, 천명의 마음을 안 마야왕후는 어느 날 궁중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용춘을 불러, 천명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629년 음력 8월 김유신은 진평왕의 명령을 받고 소판인 아버지와 김춘추의 아버지 파진찬 김용춘을 따라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1차 접전에서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한 신라군은 사기가 꺾인 채 싸울 의지마저 잃고 말았다. 이때 중당당주로 출전한 김유신은 혈혈단신으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고구려 진영을 누비며 적을 교란시킨 후 순식간에 고구려 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 모습을 보고 기세가 오른 신라군은 앞으로 진격하여 고구려 군사 5천여 명을 죽이고 1천여 명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성 안에 남아 있던 고구려군은 신라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하고 말았다. 김용수는 화랑세기에 의하면 언제 사망하였는지 명확하지 아니라고 다만 김춘추의 생부로서 죽을 때 동생 김용춘에게 부인이던 천명 공주와 김춘추를 맡겼다라고 한다. 분류:신라의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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