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성(鍾城)은 조선초의 육진중의 하나이다. 여진의 침입이 잦아지자 세종 때 김종서로 하여금 이 방면의 경략에 적극적으로 종사케 하였다. 그 결과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6진이 설치되었다. 본래부터 치첩(雉堞)의 제도가 없었다. 물론 김종서(金宗瑞) 장군이 쌓은 종성(鍾城)의 성제가 있긴 했으나, 이것은 중국의 제도를 대충 모방한 것이어서 치첩만은 못하다.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 여종경(呂宗敬)으로 하여금 길주 목사(吉州牧使) 조완벽(趙完璧)과 더불어 종성(鍾城)의 군사를 거느리고 용성평에 주둔하여 변(變)에 응하게 하였다. 원균은 어려서부터 날쌔고, 힘이 세었다고 한다. 자라서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이 되어 선산만호(造山萬戶)로 봉직(封職)되었을 때 북쪽 오랑캐를 토벌(討伐)하였는데 공이 커서 일반적인 진급의 한계를 뛰어 넘어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었다가, 다시 종성(鍾城)으로 옮겨서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擊破)했다고 한다. 왜란 당시 인심이 이미 흩어지고 성 안은 텅 비어 부득이 이영을 보내 회령을 지키게 하고 한극성을 보내 종성을 지키게 하였다. 분류:조선 분류:육진
종성(鍾城)은 조선초의 육진중의 하나이다. 여진의 침입이 잦아지자 세종 때 김종서로 하여금 이 방면의 경략에 적극적으로 종사케 하였다. 그 결과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6진이 설치되었다. 본래부터 치첩(雉堞)의 제도가 없었다. 물론 김종서(金宗瑞) 장군이 쌓은 종성(鍾城)의 성제가 있긴 했으나, 이것은 중국의 제도를 대충 모방한 것이어서 치첩만은 못하다.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 여종경(呂宗敬)으로 하여금 길주 목사(吉州牧使) 조완벽(趙完璧)과 더불어 종성(鍾城)의 군사를 거느리고 용성평에 주둔하여 변(變)에 응하게 하였다. 원균은 어려서부터 날쌔고, 힘이 세었다고 한다. 자라서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이 되어 선산만호(造山萬戶)로 봉직(封職)되었을 때 북쪽 오랑캐를 토벌(討伐)하였는데 공이 커서 일반적인 진급의 한계를 뛰어 넘어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었다가, 다시 종성(鍾城)으로 옮겨서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擊破)했다고 한다. 왜란 당시 인심이 이미 흩어지고 성 안은 텅 비어 부득이 이영을 보내 회령을 지키게 하고 한극성을 보내 종성을 지키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0권 함경도(咸鏡道)종성도호부(鍾城都護府) 동쪽은 온성부(穩城府) 경계까지 27리, 북쪽은 같은 부의 경계까지 87리, 서쪽은 두만강(豆滿江)까지 1리, 서울과의 거리는 2천 38리이다.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근년에 중국 관리가 종성(鍾城)에 가서 홀온(忽溫)을 설유했는데 이때에도 그곳에 있는 왜인들이 그 사실을 들어 알았다.” 분류:조선 분류:육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