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검성(王儉城) 또는 왕험성(王險城)은 고조선의 수도이다. 고조선의 후기 수도로 기원전 108년에 전한 무제의 공격을 받아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위치에 대한 논란이 있다.
왕검성은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이였으며 소밀량이라고 불렸다. 왕험성(王險城), 평양이라 불리기도 한다. 왕검성은 단군 왕검의 건국지로 고조선 초기 단군 왕검의 정치적 근거지였으며 단군 왕검 이래 고조선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단기고사에서 기자 조선의 수도는 평양 왕검성이라고 하였다. 이는 번한의 왕험성을 의미한다. 전한의 요동군에는 번한성과 험독성이 있었다. 한나라의 고조선 침략은 기원전 109년 가을에 있었고, 우거왕이 죽은 것은 기원전 108년 여름이었으며, 왕검성이 실제로 거의 2년 정도를 버틴 셈이니 왕검성은 가히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만 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이 있던 곳에 낙랑군이 설치되었을거라는, 고정 관념도 형성되어 있다.
왕검성(王儉城) 또는 왕험성(王險城)은 고조선의 수도이다. 고조선의 후기 수도로 기원전 108년에 전한 무제의 공격을 받아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위치에 대한 논란이 있다.
왕검성은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이였으며 소밀량이라고 불렸다. 왕험성(王險城), 평양이라 불리기도 한다. 왕검성은 단군 왕검의 건국지로 고조선 초기 단군 왕검의 정치적 근거지였으며 단군 왕검 이래 고조선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단기고사에서 기자 조선의 수도는 평양 왕검성이라고 하였다. 이는 번한의 왕험성을 의미한다. 전한의 요동군에는 번한성과 험독성이 있었다. 한나라의 고조선 침략은 기원전 109년 가을에 있었고, 우거왕이 죽은 것은 기원전 108년 여름이었으며, 왕검성이 실제로 거의 2년 정도를 버틴 셈이니 왕검성은 가히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만 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이 있던 곳에 낙랑군이 설치되었을거라는, 고정 관념도 형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