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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환(金潤煥 1932년 3월 2일 ~ 2003년 12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정치가이다. 호는 허주(虛舟)이다. 1932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경북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후에 오하이오대학 대학원에서도 수학했다. 1955년부터 기자생활을 시작, 《영남일보》,《대구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해서 주일, 주미특파원과 편집국장 대리를 지냈다. 1979년 제10대 국회에서 유정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고, 신군부 주도세력인 전두환 노태우와 동향이라는 이점때문에 제5공화국 출범후에도 민주정의당에 들어가 권력핵심부에 쉽게 진입하였다. 1985년 문공부 차관에 임명되어 12대 국회의 의원직을 맡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11대부터 14대까지 계속 의원직을 유지했다. 이후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민정당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주일특파원때 익힌 일본식 계보,금권,막후정치의 추종자로서 군출신이 주도한 민정당 내에서 보기 드물게 야당과의 대화와 타협을 선호했기 때문에 정무장관직을 여러번 맡았다.
- 1955년부터 기자생활을 시작, 《영남일보》,《대구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해서 주일, 주미특파원과 편집국장 대리를 지냈다. 1979년 제10대 국회에서 유정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고, 신군부 주도세력인 전두환 노태우와 동향이라는 이점때문에 제5공화국 출범후에도 민주정의당에 들어가 권력핵심부에 쉽게 진입하였다. 1985년 문공부 차관에 임명되어 12대 국회의 의원직을 맡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11대부터 14대까지 계속 의원직을 유지했다. 이후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민정당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주일특파원때 익힌 일본식 계보,금권,막후정치의 추종자로서 군출신이 주도한 민정당 내에서 보기 드물게 야당과의 대화와 타협을 선호했기 때문에 정무장관직을 여러번 맡았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 이회창이 대통령선거에서 걸림돌이 될수 있는 중진을 배제하기 위해 김윤환을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김윤환은 믿었던 이회창에게 강한 배신감을 토로하면서 공천탈락파인 이기택,김광일, 조순등과 함게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여 대표에 취임, 총선에 나섰으나 낙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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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환(金潤煥 1932년 3월 2일 ~ 2003년 12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정치가이다. 호는 허주(虛舟)이다. 1932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경북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후에 오하이오대학 대학원에서도 수학했다. 1955년부터 기자생활을 시작, 《영남일보》,《대구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해서 주일, 주미특파원과 편집국장 대리를 지냈다. 1979년 제10대 국회에서 유정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고, 신군부 주도세력인 전두환 노태우와 동향이라는 이점때문에 제5공화국 출범후에도 민주정의당에 들어가 권력핵심부에 쉽게 진입하였다. 1985년 문공부 차관에 임명되어 12대 국회의 의원직을 맡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11대부터 14대까지 계속 의원직을 유지했다. 이후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민정당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주일특파원때 익힌 일본식 계보,금권,막후정치의 추종자로서 군출신이 주도한 민정당 내에서 보기 드물게 야당과의 대화와 타협을 선호했기 때문에 정무장관직을 여러번 맡았다.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자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고 이후 민정당 원내 사령탑을 맡았고, 3당합당 이후에는 "김영삼대세론"을 설파하여 동요하는 민정계를 설득해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김영삼 정부 출범후 민주계가 득세했을때도 민자당 사무총장과 정무장관직을 맡으면서 민정계의 수장노릇을 하였다. 이후 대통령후보경선을 염두에 두는듯 했으나, 이회창이 민자당이 이름을 바꾼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자 이를 적극 지원하여 이회창의 후보확정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역할들 때문에 "킹메이커"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 이회창이 대통령선거에서 걸림돌이 될수 있는 중진을 배제하기 위해 김윤환을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김윤환은 믿었던 이회창에게 강한 배신감을 토로하면서 공천탈락파인 이기택,김광일, 조순등과 함게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여 대표에 취임, 총선에 나섰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이회창의 집권을 막기 위해 "영남후보론"을 내세우며 동분서주했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2002년 대통령선거 막바지에 이회창과 화해하고 지지를 선언했다. 신장암으로 2003년 사망했다.
- 1955년부터 기자생활을 시작, 《영남일보》,《대구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해서 주일, 주미특파원과 편집국장 대리를 지냈다. 1979년 제10대 국회에서 유정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고, 신군부 주도세력인 전두환 노태우와 동향이라는 이점때문에 제5공화국 출범후에도 민주정의당에 들어가 권력핵심부에 쉽게 진입하였다. 1985년 문공부 차관에 임명되어 12대 국회의 의원직을 맡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11대부터 14대까지 계속 의원직을 유지했다. 이후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민정당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주일특파원때 익힌 일본식 계보,금권,막후정치의 추종자로서 군출신이 주도한 민정당 내에서 보기 드물게 야당과의 대화와 타협을 선호했기 때문에 정무장관직을 여러번 맡았다.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자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고 이후 민정당 원내 사령탑을 맡았고, 3당합당 이후에는 "김영삼대세론"을 설파하여 동요하는 민정계를 설득해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김영삼 정부 출범후 민주계가 득세했을때도 민자당 사무총장과 정무장관직을 맡으면서 민정계의 수장노릇을 하였다. 이후 대통령후보경선을 염두에 두는듯 했으나, 이회창이 민자당이 이름을 바꾼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자 이를 적극 지원하여 이회창의 후보확정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역할들 때문에 "킹메이커"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 이회창이 대통령선거에서 걸림돌이 될수 있는 중진을 배제하기 위해 김윤환을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김윤환은 믿었던 이회창에게 강한 배신감을 토로하면서 공천탈락파인 이기택,김광일, 조순등과 함게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여 대표에 취임, 총선에 나섰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이회창의 집권을 막기 위해 "영남후보론"을 내세우며 동분서주했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2002년 대통령선거 막바지에 이회창과 화해하고 지지를 선언했다. 신장암으로 200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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