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마르셰 [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1732. 1. 24 프랑스 파리~ 1799. 5. 18 파리]는 프랑스의 작가이다. 파리 출생의 보마르셰는 여러 방면으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시계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뛰어난 시계제작기술과 더불어 하프 연주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보마르셰의 생애는 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다툼과 모험·음모의 드라마이다.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시계 톱니바퀴의 회전속도를 고르게 하는 장치인 탈진기(脫進機)를 발명했는데, 이 장치의 특허문제로 소송사건에 휘말렸다. 이 소송을 시작으로 하여 그후에도 여러 번 소송이 벌어졌다. 그는 이런 소송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재치가 번뜩이는 일련의 훌륭한 반론들(〈회고록 Mémoires〉)을 썼는데, 비록 법정에서는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 반론으로 명성을 얻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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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마르셰 [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1732. 1. 24 프랑스 파리~ 1799. 5. 18 파리]는 프랑스의 작가이다. 파리 출생의 보마르셰는 여러 방면으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시계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뛰어난 시계제작기술과 더불어 하프 연주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보마르셰의 생애는 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다툼과 모험·음모의 드라마이다.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시계 톱니바퀴의 회전속도를 고르게 하는 장치인 탈진기(脫進機)를 발명했는데, 이 장치의 특허문제로 소송사건에 휘말렸다. 이 소송을 시작으로 하여 그후에도 여러 번 소송이 벌어졌다. 그는 이런 소송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재치가 번뜩이는 일련의 훌륭한 반론들(〈회고록 Mémoires〉)을 썼는데, 비록 법정에서는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 반론으로 명성을 얻었다. 재능을 인정받아 궁정에 출입하기 시작한 그는 유력인사들과 쉽게 친분을 쌓을 수 있었으며 그들이 주는 정보를 이용해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보마르셰의 진정한 재능은 그 어느것 보다 글을 쓰는 재주에 있었다. 자신의 부를 이용해 귀족의 작위를 산 그는 본격적인 극작가의 길로 들어서 몇 편의 희곡을 완성시켰다. 지금도 참신함을 유지하고 있는 2편의 뛰어난 희극 〈세비야의 이발사 Le Barbier de Séville〉(1775)·〈피가로의 결혼 Le Mariage de Figaro〉(1784)을 썼다.그중 1775년 초연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세비야의 이발사'는 그를 인정받는 극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이를 계기로 루이 16세의 밀사로까지 활약을 하게 되었다. 1773년부터 그는 법적인 문제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 루이 15세와 루이 16세의 밀명을 띠고 영국과 독일을 돌아다녔다. 극작가로서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졌지만 그는 축재에 몰두하여 미국 독립전쟁을 위해 무기를 팔았고, 볼테르의 작품을 처음으로 완간했다. 그의 희곡 작품 중에서는 2편의 고전적 희극만이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부유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 때 감옥에 갇혔지만(1792) 옛 애인의 개입으로 석방되었다. 약삭빠른 하인이라는 전형을 보마르셰가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이런 인물 유형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희극에 등장했음), 그의 두 희곡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피가로는 이런 유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보마르셰는 분명 계급의식적인 공감을 가지고 하인의 재치와 교활함을 묘사했다. 〈세비야의 이발사〉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로시니가 지은 인기 있는 오페라의 기초가 되었으며,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에 영감을 준 2번째 희곡은 귀족의 특권을 공공연히 비난함으로써 1789년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회적 격변을 어느 정도 예고하고 있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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