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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예(符隸)는 서기전924년 부여사람 왕문이 신전이 복잡하여 부예를 만들었다. 왕문은 왕수긍의 후손이다. 왕문(王文)은 한수(漢水) 사람으로 부여인(夫餘人)이라고도 하며 부예(符隸)를 만들고 이두(吏讀)를 만들었다. 왕문(王文)이 처음으로 전(篆)이 번거롭다 하여 획을 줄이고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 썼다. 이 글자체가 예서체가 되는 것이며 진나라 때에 정막이 사신을 받들어 조선에 왔다가 한수(漢水)에서 왕문의 예법(隸法)을 얻었다. 부예(符隸)는 예서체로서 일설에는 노예들까지 쉽게 알수 있을 정도로 쉽게 만든 글이라고 하였다. 대전(大篆: 갑골문을 개량한 주나라 문자) 사용이 빈번해지자 한수(漢水)사람 왕문(王文, BCE 9C)이 부예(符隸)를 만들고 BCE 865년 천왕에게 건의하여 삼한에 이두법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왕문 부예(符隸)에서 부(符)는 부호(符號), 증표(證票), 부절(符節), 도장(圖章) 이란 의미입니다. 예(隸)는 필체의 하나이고, 어떤 곳에 붙다, 맞닿다, 도달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분류:문자사
- 부예(符隸)에서 부(符)는 부호(符號), 증표(證票), 부절(符節), 도장(圖章) 이란 의미다. 신시의 녹서, 자부의 우서, 치우의 화서, 복희의 용서, 단군의 신전, 부여의 부예, 진(秦)의 팔분법, 중국의 한자 등은 모두 신시의 태고 문자를 계승하거나 발전 변용한 것이다. 왕문은 부여 출신이며 번한 땅의 한수 사람으로서 왕수긍의 후손이며 이두법과 부예를 만들었다. 왕문은 기원전 12세기경의 부여인(夫餘人). 번거러운 자획을 대폭 축소하여 부예(符隸)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여 음성표기법을 써서 이두문(吏讀文)을 개발하였다고 함. <文化柳氏譜>에서는 왕문이 쓴 글은 전자 같기도 하고 부적 같기도 한데, 왕문은 왕수긍(箕子의 師士)의 아버지다(王文書文字而 如篆 如符文 卽 受兢之父)라고 하고 있으나 그 진부를 확인할 증거는 없다. 부여사람 왕문은 처음 전문(篆文)을 번거럽다 여기고 좀 그 획을 없애고 부예(符隸)를 만들어 이를 사용했다. 진(秦)나라 때 정막(程邈)은 숙신(肅愼)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隸法)을 한수(漢水)에서 얻었고 또 그 획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 형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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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부예(符隸)는 서기전924년 부여사람 왕문이 신전이 복잡하여 부예를 만들었다. 왕문은 왕수긍의 후손이다. 왕문(王文)은 한수(漢水) 사람으로 부여인(夫餘人)이라고도 하며 부예(符隸)를 만들고 이두(吏讀)를 만들었다. 왕문(王文)이 처음으로 전(篆)이 번거롭다 하여 획을 줄이고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 썼다. 이 글자체가 예서체가 되는 것이며 진나라 때에 정막이 사신을 받들어 조선에 왔다가 한수(漢水)에서 왕문의 예법(隸法)을 얻었다. 부예(符隸)는 예서체로서 일설에는 노예들까지 쉽게 알수 있을 정도로 쉽게 만든 글이라고 하였다. 대전(大篆: 갑골문을 개량한 주나라 문자) 사용이 빈번해지자 한수(漢水)사람 왕문(王文, BCE 9C)이 부예(符隸)를 만들고 BCE 865년 천왕에게 건의하여 삼한에 이두법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왕문 부예(符隸)에서 부(符)는 부호(符號), 증표(證票), 부절(符節), 도장(圖章) 이란 의미입니다. 예(隸)는 필체의 하나이고, 어떤 곳에 붙다, 맞닿다, 도달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분류:문자사
- 부예(符隸)에서 부(符)는 부호(符號), 증표(證票), 부절(符節), 도장(圖章) 이란 의미다. 신시의 녹서, 자부의 우서, 치우의 화서, 복희의 용서, 단군의 신전, 부여의 부예, 진(秦)의 팔분법, 중국의 한자 등은 모두 신시의 태고 문자를 계승하거나 발전 변용한 것이다. 왕문은 부여 출신이며 번한 땅의 한수 사람으로서 왕수긍의 후손이며 이두법과 부예를 만들었다. 왕문은 기원전 12세기경의 부여인(夫餘人). 번거러운 자획을 대폭 축소하여 부예(符隸)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여 음성표기법을 써서 이두문(吏讀文)을 개발하였다고 함. <文化柳氏譜>에서는 왕문이 쓴 글은 전자 같기도 하고 부적 같기도 한데, 왕문은 왕수긍(箕子의 師士)의 아버지다(王文書文字而 如篆 如符文 卽 受兢之父)라고 하고 있으나 그 진부를 확인할 증거는 없다. 부여사람 왕문은 처음 전문(篆文)을 번거럽다 여기고 좀 그 획을 없애고 부예(符隸)를 만들어 이를 사용했다. 진(秦)나라 때 정막(程邈)은 숙신(肅愼)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隸法)을 한수(漢水)에서 얻었고 또 그 획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 형으로 고쳤다. 왕수긍은 기자(箕子)의 사사(師士)였다고 하는 바, 기자는 서기전 1122년경 조선으로 동래하여 망명한 자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 왕수긍이 기자의 사사였으므로 왕문의 선조가 되는 셈이다. 왕문은 서기전 924년경 사람이므로 왕수긍과는 약 200년의 차이가 있으니 1세대 30년으로 잡더라도 왕문이 왕수긍의 6세손 또는 7세손이 된다고 보인다. 부예는 부아의 방언이다. 부예(浮瞖)는 눈자위에 흰 점이 생겨 각막 위를 덮기 시작하여 눈동자 전체로 퍼지는 병. 염증을 일으켜 몹시 가렵고 시력이 나빠진다. 부예는 겉이 얼음처럼 흰 예막으로 눈동자가 둘러싸였는데 외자에서부터 생겨서 검은자위로 들어갔고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고 핏기도 없는 것이다. 분류:녹도 분류:부례 분류:한자파생문자 분류: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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