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 산성은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하남면 일대에 있는 용화산(878m) 정상에 쌓은 석성이다. 용화산성은 둘레 820m의 복합식 산성으로 성벽은 대체로 서쪽에서 북쪽에 이르는 구간에만 제대로 축조했다. 그리고 동벽과 남벽은 모두 가파른 절벽이라 사실상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성벽을 축조할 필요성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낮게나마 석축했던 흔적이 있다. 용화산성에 대한 조사는 1996년 강원대 박물관이 시작했고 2001년에는 육군박물관이 지표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삼악산성과 용화산성의 축조 연대와 사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삼국의 건국 이전부터 존재했던 춘천을 중심으로 한 맥국(貊國)과의 관련성이다. 삼악산성이 남한산성으로, 용화산성이 맥국의 북한산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인 것이다. 춘천지역에 존재했던 맥국은 낙랑의 지배시에는 백제 공격의 대상이었지만 신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신라의 기림왕(基臨王) 때 낙랑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신라에 복속했다. 예로 춘천의 진산이었던 봉의산(鳳儀山)에 위치한 봉의산성에서 1253년 몽고군의 대대적 공격으로 인해 수성 군민 전원이 전멸한 패전도 있었다.
용화 산성은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하남면 일대에 있는 용화산(878m) 정상에 쌓은 석성이다. 용화산성은 둘레 820m의 복합식 산성으로 성벽은 대체로 서쪽에서 북쪽에 이르는 구간에만 제대로 축조했다. 그리고 동벽과 남벽은 모두 가파른 절벽이라 사실상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성벽을 축조할 필요성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낮게나마 석축했던 흔적이 있다. 용화산성에 대한 조사는 1996년 강원대 박물관이 시작했고 2001년에는 육군박물관이 지표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삼악산성과 용화산성의 축조 연대와 사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삼국의 건국 이전부터 존재했던 춘천을 중심으로 한 맥국(貊國)과의 관련성이다. 삼악산성이 남한산성으로, 용화산성이 맥국의 북한산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인 것이다. 춘천지역에 존재했던 맥국은 낙랑의 지배시에는 백제 공격의 대상이었지만 신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신라의 기림왕(基臨王) 때 낙랑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신라에 복속했다. 이 지역 일대는 후삼국 전쟁기에는 태봉국의 궁예가 점령·통치한 곳으로 궁예와 관련이 있다. 태봉국의 수도였던 철원을 중심으로 궁예와 관련된 산성들은 대체로 매우 험준한 산악에 축조된 점이다. 철원의 명성산성을 비롯해 포천의 보개산성·운악산성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궁예가 강원도에서 주로 활동했던 행적으로 보아 이 산성들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내세운 미륵세계관이 바로 용화(龍華) 이상세계의 건설이었기에 용화산은 궁예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쟁사 면에서 산성은 삼국통일기로부터 고려 건국기는 내전기의 영토쟁탈전으로 평지 부근에 존재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민족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대량학살과 장기전의 양상으로 변해 종전의 산성으로는 농성전을 전개할 수 없어 새로운 입보처를 찾게 됐다. 이와 같이 산성은 규모가 커지고 험준한 지형과 궁벽한 곳에 축조됐다. 전란기의 급조 축조로 인해 축성이 허술한 점이나, 혹은 성벽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한 수직 기둥 홈의 축조 방식이 선택된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고려 초기 거란의 침입, 특히 13세기 중엽 전세계를 정복한 몽고제국의 파상적인 대규모 침입에 대항하면서 피난하기 위해 강원도 지역의 전형적인 산성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평지에 인접한 산성으로는 그들의 무차별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예로 춘천의 진산이었던 봉의산(鳳儀山)에 위치한 봉의산성에서 1253년 몽고군의 대대적 공격으로 인해 수성 군민 전원이 전멸한 패전도 있었다. 몽고군의 약점이 수전(水戰)과 산악전이었으므로 고려군은 이를 최대한 활용했던 것이다. 두 산성도 바로 이러한 몽고군의 약점을 이용, 험지에 축조한 산성이었기에 그들이 감히 공격할 수 없었던 관계로 그들과의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이라는 역사 기록은 없다. 그렇지만 몽고군에 항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농성함으로써 결국 몽고군이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가게 만든 고려인의 의지를 보여준 현장으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