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서기전720년 연(燕)목후 시기 정나라 무공의 아들 장공이 주나라의 정치를 맡고 있었던 것은 주나라가 서융에게 쫏겨나 정나라 근처 낙읍으로 이동 하였고, 통치체제가 흔들리고 있으므로 제후국중 서열이 가장 높은 정나라가 정치를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평왕은 괵(공)에게 정권을 이양하기를 원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정나라와 인질을 교환 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주평왕이 죽자 주나라 사람들이 괵(공)에게 다시 정권을 이양 하려 하자 정나라가 주나라를 공격하여 온 지방의 보리를 베어가고, 성주 땅의 벼를 베어갔다. 여기서 온 지방의 보리와 성주 땅의 벼를 베다라는 의미는 정나라가 군사적 공격을 가했지만 보리와 벼는 그 지방 국인들의 주된 음식으로서 국인들의 비난을 피하고 압박할 수 있는 상징적 의미의 공격을 말한다. 이 당시 연(燕)의 지역 이었던 온 지방에 대한 공격을 주나라를 공격했다고 하는 것은 기원전 841년 주려왕 난리 당시 소공 가문에서 주선왕 옹립에 큰 공을 세워 주나라의 정사에 깊숙이 개입 하였고, 주나라 도읍 이동에 따라 소공세력은 온 지방 주변으로 이동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주나라 북쪽에 위치 했던 당진, 위(衛), 연(燕)은 자치 정도의 제후국으로 주나라의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나라가 동문의 사역에 대한 보복으로 위나라의 목(목야) 지방을 침입 하였다. 동문의 사역이란 기원전 719년 위나라 주우의 공격으로 정나라 도읍의 동문이 침탈 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목 지방은 목야를 말하는 것인데 옛날 주무왕이 은나라 정벌시 은나라 군대와 일대 혈전을 벌인 지역이다. 정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는데 위나라는 연(燕)의 군대를 동원하여 정나라를 공격 하였다. 왜 일까? 하나는 연(燕)나라는 위나라의 간접 통치를 받고 있었을 경우이다. 또 하나는 위환공의 죽음과 환공을 죽인 주우가 주살되어 위나라 통치자의 부재이다. 이번 전쟁의 결과는 연(燕)나라의 패배로 끝났다. 이 단락에서 중요한 것은 연(燕)나라 군대의 등장이고, 연(燕)나라 군대와의 싸움 지역이 정나라와 근접한 지역인 목야 라는 것이다. 북융이 처음 등장 하는데 위치 및 종족을 살펴보면 북융의 공격 대상이 정나라 이다. 이는 북융과 정나라의 거리 개념상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 했을 것이다. 당시 정나라와 가장 근접했고 융이라고 불리만한 종족은 적(狄)밖에 없다. 적(狄)족은 당진의 도성인 익성 동북쪽에 바로 위치 하였다. 적(狄)이 정나라를 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기 주본기="주본기">에 주(周)환왕 3년 기원전 717년 정장공(鄭庄公)이 래조하러 왔으나 환왕이 예를 갖추어 대하지 않았다. 환왕 5년 기원전 715년 정백(鄭伯)이 원한을 품고 태산에 제사 지내는 일을 그만두고 그 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주(周)왕실이 정나라에 하사했던 魯나라 근처의 팽전(祊田)과 주공(周公)에게 제사 지내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라고 하사했던 정나라 부근의 魯나라 소유인 허전(許田)을 바꾸었다. 주(周)환왕 입장에서 정장공이 태산에 제사 지내는 것을 거부 하였고, 제사 비용에 충당하기 위해 주(周)왕실에서 하사했던 땅을 임의로 맞바꾼 처사는 주(周)왕실에 대한 모욕 이었다. 주(周)환왕은 당시 강국이었던 정(鄭)나라를 군사적으로 도모할 힘이 없기에 적(狄)족과 모종의 밀약을 하고 정(鄭)나라를 공격 하였던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적(狄)족은 패배 하였으나, 남쪽 황하의 비옥한 땅으로의 영향력을 확대 시켰다 는 것이 이득 이었다. 기원전 714년 북융과의 전쟁 이후 정(鄭)나라가 주(周)왕실로부터 취득한 지역중에, 소분생의 땅 이었던 ( 소분생은 주무왕 시대 사람이다) 溫, 原, 盟, 懷 지역이 중요하다. 이유는 그곳은 연(燕) 소공 세력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 정나라의 영토는 황하 북안의 지역까지 확보 하였고, 위나라와 연(燕)은 동북쪽으로 이동 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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