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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림이사금(基臨泥師今, ? ~310년, 재위; 298년~310년) 또는 기림왕(基臨王)은 신라의 15번째 왕이며, 기립(基立)이라고도 한다. 조분 이사금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이찬 걸숙(乞淑)이다. 삼국사기에는 걸숙과 기림이 모두 조분 이사금의 손(孫)이라고 하여 제대로 된 세계를 알 수 없다. 성품이 너그럽고 두터워서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298년 2월에 서울에 안개가 짙게 끼어 사람을 분별할 수가 없었는데 5일만에 걷혔다. 겨울 12월에 유례 이사금이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기림 이사금이 계승하였다. 300년(庚申/ 檀紀2633년/ 佛紀844년) 고구려, 봉상왕을 폐하고 미천왕(美川王)을 세운다. 300년 정월 왜와 화친하고, 비열홀(比列忽)에 순행하여 가난한 자를 위문하였다. 우두주(牛頭州;지금의 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을 망제(望祭)하였으며, 그해 음력 3월 낙랑,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 일본과 수교하고, 노령자와 빈민들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태백산에서의 제사는《삼국사기》에 일성 이사금 5년(138년) 10월, 기림 이사금 3년(300년) 3월 두 차례의 기록이 있다. 13년 6월 왕이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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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림이사금(基臨泥師今, ? ~310년, 재위; 298년~310년) 또는 기림왕(基臨王)은 신라의 15번째 왕이며, 기립(基立)이라고도 한다. 조분 이사금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이찬 걸숙(乞淑)이다. 삼국사기에는 걸숙과 기림이 모두 조분 이사금의 손(孫)이라고 하여 제대로 된 세계를 알 수 없다. 성품이 너그럽고 두터워서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298년 2월에 서울에 안개가 짙게 끼어 사람을 분별할 수가 없었는데 5일만에 걷혔다. 겨울 12월에 유례 이사금이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기림 이사금이 계승하였다. 300년(庚申/ 檀紀2633년/ 佛紀844년) 고구려, 봉상왕을 폐하고 미천왕(美川王)을 세운다. 300년 정월 왜와 화친하고, 비열홀(比列忽)에 순행하여 가난한 자를 위문하였다. 우두주(牛頭州;지금의 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을 망제(望祭)하였으며, 그해 음력 3월 낙랑,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 일본과 수교하고, 노령자와 빈민들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태백산에서의 제사는《삼국사기》에 일성 이사금 5년(138년) 10월, 기림 이사금 3년(300년) 3월 두 차례의 기록이 있다. 307년 국호를 신라로 확정했다. 삼국사기에는 기림이사금 10년에 신라(新羅)를 다시쓰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전 기록에는 신라 라는 국호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신라(新羅)라는 명칭을 쓰기까지 쓰여졌던 이름들을 나열해보면 걸의식국(乞衣食國), 비집기국(飛集基國), 시라(尸羅), 사라(斯羅),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괴), 계림(鷄林), 서야벌(徐耶伐), 서나벌(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주로 사용하던 이름이 모두가 누에치기와 관련지어 부른 것이 특이 하다.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키워 비단을 생산하고 그 교역을 통하여 부자 나라가 되기 시작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13년 6월 왕이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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