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산 [會稽山] 은 월나라 회계에 있었던 산이다. 구려(九黎)는 번한의 소속이 된다. 서토에 있는 구려(九黎)의 역사를 약설하면, 부루태자가 지금의 회계산인 도산에서 회의를 할 때 소집한 구려(九黎)는 오월(吳越) 지방에 도읍하였고, 그 후예가 산월(山越), 좌월(左越) 등이 있다. 월나라의 왕 구천은 충신(범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나라를 선제공격했다. 월나라 군사는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다. 싸움에 크게 패한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견디지 못하였다. 월왕이 산 위에 쌓은 성을 무너뜨렸다. 오나라 군사가 포위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헌책에 따라 우선 오나라의 재상(宰相)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준 뒤 항복하였다. 포로가 된 구천과 신하 범려(范蠡)는 3년 동안 부차의 노복으로 일하는 등 갖은 고역과 모욕을 견디었다. 서시(西施)를 이용한 미인계로써 구천 일행은 무사히 완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차는 왕손락과 계사(溪斯)에게 3만 군사를 주어 회계산과 완위의 구천 일행을 감시하도록 지시하였다.
회계산 [會稽山] 은 월나라 회계에 있었던 산이다. 구려(九黎)는 번한의 소속이 된다. 서토에 있는 구려(九黎)의 역사를 약설하면, 부루태자가 지금의 회계산인 도산에서 회의를 할 때 소집한 구려(九黎)는 오월(吳越) 지방에 도읍하였고, 그 후예가 산월(山越), 좌월(左越) 등이 있다. 월나라의 왕 구천은 충신(범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나라를 선제공격했다. 월나라 군사는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다. 싸움에 크게 패한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견디지 못하였다. 월왕이 산 위에 쌓은 성을 무너뜨렸다. 오나라 군사가 포위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헌책에 따라 우선 오나라의 재상(宰相)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준 뒤 항복하였다. 포로가 된 구천과 신하 범려(范蠡)는 3년 동안 부차의 노복으로 일하는 등 갖은 고역과 모욕을 견디었다. 서시(西施)를 이용한 미인계로써 구천 일행은 무사히 완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차는 왕손락과 계사(溪斯)에게 3만 군사를 주어 회계산과 완위의 구천 일행을 감시하도록 지시하였다. 선진(先秦) 때 임공자(任公子)라는 사람이 50필의 거세한 소를 미끼로 매달아 회계산(會稽山)에 걸터앉아서 동해 바다로 낚시줄을 던졌는데, 1년 뒤에 큰 고기를 낚았는데, 그 지느러미가 산처럼 컸다고 한다. 육손은 일족을 이끌고 손권의 휘하에 들어가 회계산과 파양호에 근거하던 도적을 무찔러 명성을 얻었다. 219년에는 여몽을 대신하여 형주에 주둔, 탁월한 전략으로 관우를 무찔러 형주를 오나라의 영유로 삼았다. 회계산 향로봉아래 불교성지로 봉선사가 있다. 향로봉으로 오르는 산등성이, 명당자리라는 너럭바위에서 아직도 단풍든 참나무 잎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