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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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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도(中都)는 금나라의 수도였다. 원나라의 대도가 되었다가 명나라시대부터 현재까지의 베이징이다. 내부에 있는 성(城)은 요나라의 남경 석진부이고, 바깥에 있는 성(城)은 금나라의 중도 대흥부이다. 금은 요의 연경 석진부를 중도 대흥부로 바꿔 불렀다. 금나라의 실질적인 수도가 바로 중도였고, 현재의 북경이다. 원나라의 연경로(燕京路) 또는 대도로(大都路), 명나라의 북평부(北平府) 또는 북경순천부이다. 금나라는 연경을 중도(中都)로 정하고, 원래 요나라가 이곳에 설치했던 석진부(析津府)를 대흥부(大興府)로 고쳐 국가가 대대적으로 흥성할 것임을 표시했다. 1125년 여진의 금(金)왕조는 요를 합병하고 1153년 금나라 해릉왕 완안량(完颜亮)이 수도를 요(遼)의 남경으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앙수도인 중도라고 불렀다. 중도성은 금나라의 4대 황제인 해릉왕(海陵王) 이 만주지방에서부터 중국북부를 점령하고 난 뒤인 서기 1151년(天德 3년) 짓기 시작해 2년 뒤인 1153년(貞元 원년)에 완공한 것으로 돼 있다. 중도성은 성 면적이 18평방킬로미터, 한 변이 4킬로미터를 넘는 장방형의 성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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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도(中都)는 금나라의 수도였다. 원나라의 대도가 되었다가 명나라시대부터 현재까지의 베이징이다. 내부에 있는 성(城)은 요나라의 남경 석진부이고, 바깥에 있는 성(城)은 금나라의 중도 대흥부이다. 금은 요의 연경 석진부를 중도 대흥부로 바꿔 불렀다. 금나라의 실질적인 수도가 바로 중도였고, 현재의 북경이다. 원나라의 연경로(燕京路) 또는 대도로(大都路), 명나라의 북평부(北平府) 또는 북경순천부이다. 금나라는 연경을 중도(中都)로 정하고, 원래 요나라가 이곳에 설치했던 석진부(析津府)를 대흥부(大興府)로 고쳐 국가가 대대적으로 흥성할 것임을 표시했다. 1125년 여진의 금(金)왕조는 요를 합병하고 1153년 금나라 해릉왕 완안량(完颜亮)이 수도를 요(遼)의 남경으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앙수도인 중도라고 불렀다. 중도성은 금나라의 4대 황제인 해릉왕(海陵王) 이 만주지방에서부터 중국북부를 점령하고 난 뒤인 서기 1151년(天德 3년) 짓기 시작해 2년 뒤인 1153년(貞元 원년)에 완공한 것으로 돼 있다. 중도성은 성 면적이 18평방킬로미터, 한 변이 4킬로미터를 넘는 장방형의 성곽이다. 1214년 금 선종 완안순이 개봉(카이펑)으로 남천하였다. 1215년에 몽골이 중도를 불태우고 1267년에 금(金) 수도의 북쪽으로 대도의 이름으로 다시 재건하였다. 중도성의 위치는 현재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기록과 유구 등을 토대로 할 때 현 북경성의 서남쪽 귀퉁이로부터 더 서남쪽으로 나가는 곳, 즉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북경시 선무구(宣武區)일대로서, 북경시 서남쪽의 제2 순환로와 제3 순환로 사이 일대에 해당한다. 북경의 제2 순환로를 다녀도 그 때의 지명은 별반 남아있지 않고, 제3 순환로를 달리다 보면 유일하게 옛 지명과 비슷한 것을 만난다. 여택교(麗澤橋)라는 지명. 바로 중도성의 서남쪽문인 여택문(麗澤門)의 옛 이름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 이름으로 볼 때에 여기가 중도성의 서남쪽 끝 무렵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중도성은 또 형식상으로 요(遼)나라의 남경성을 기초로 해서 동쪽과 남쪽, 서쪽을 각각 늘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옛날의 성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 아니라 송나라의 수도인 변경( 京, 즉 開封)의 궁궐과 성곽형식을 차용해서 대대적으로 확장, 건설한 것이다. 성곽에는 모두 13개의 문을 내었다. 성 안은 대성(大城)과 황성(皇城),궁성(宮城)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대성의 한 가운데에 황성이 있었고, 황성 속에 또 궁성이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궁성의 전각(殿閣)과 누각(樓閣), 대(臺) 등은 규모가 웅대하고 기세가 당당했으며, 화려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 성을 쌓은 공사를 총지휘한 사람, 곧 축성의 총책임자가 발해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이름은 장호(張浩)! 장호는 자가 호연이며, 요양 발해인이다. 본성은 고로서, 동명왕의 후손이다…." 중국의 정사인 25사중에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공식역사서인 『금사(金史)』는 열전(列傳)속에서 장호라는 인물에 관한 열전을 따로 만들어 그에 대해 상세히 전해주고 있다. 『금사(金史)』는 원나라 때 편찬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열전에 당당히 포함됐다면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는 금나라 초기에 정치를 안정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장호는 금나라 4대 황제인 해릉왕의 명을 받아 금나라의 새로운 수도가 될 중도성의 건설 총책임자로 뽑혔다. 그에 의해서 금나라의 수도는 급피치로 건설돼 3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완성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북경성의 원조가 되는 금나라의 중도성은 발해인 장호의 책임 하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기념물인 것이다. 발해라는 한 '잊혀진 왕국'이 발해왕국의 본거지며 수도가 있던 흑룡강성이나 길림성이 아닌 중국의 수도 북경에서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다. 그것을 주도한 삶이 발해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만주 땅이 아닌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발해인의 발자취와 숨결을 처음 찾아내어 느낀다는 것은 발해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 포함되는 한 보통이상의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맨 처음 중도성을 만들 때에는 성 서쪽에 있는 천연 호수인 서호(西湖)에서부터 세마구(洗馬溝)라고 불리는 하천을 파서, 우선 성 서쪽편으로부터 물이 흘러들어 해자(垓字:성 둘레를 보호하는 도랑이나 하천으로, 중국에서는 성을 보호하는 하천이란 뜻으로 護城河로 부른다)가 되도록 했고, 다시 그 물이 황성의 서쪽으로 들어와서 황실 정원을 흐르도록 했다. 황실 정원의 이름은 동락원(同樂園)으로서, 이 정원 안에 물이 고이는 서화담(西華潭)을 만들고 그 위에 용진교(龍津橋)라는 다리를 놓았다. 다리는 한가운데에 황제가 걷는 길과 양쪽으로 비빈(妃嬪)과 신하들이 걷는 길 등 세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정교한 조각솜씨가 돋보이는 옥으로 된 멋진 난간이 그 위에 장식돼 있어서 사람들을 매혹시켰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또한 궁궐은 장려했다. 연연히 수백, 수천 동이 이어지어진 궁궐들은 아방궁이라도 못 따라올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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