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암진(長巖鎭)은 서천의 진포대첩승전지이다. 기벌포가 바로 장암진으로 알려져 있다. 모래찜질의 풍속은 언제부턴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고려 때 포영이었던 장암진이 유배지였을 때 유배 온 선비들이 시간을 보냈던 장소로 구전되고 있다. 천혜의 요새, 기벌포와 탄현기벌포는 지금의 충남 장항읍 장암리에 있는 장암진 성터 서남쪽의 큰 돌산을가리킨다. “우왕6년(1380년)8월 왜적의 배 500척이 鎭浦口에 들어와서 굵은 밧줄로 서로 얽어 매여 놓고 일부 병력으로 그것을 수비하면서 드디어 상륙한 후 분산하여 각 州,郡에 들어가서 방화 약탈하였다. 이때 나세 장군과 심덕부 등이 진포에 이르러 화포로 그 선박을 불 지르니 배를 지키던 적들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서 거의 전멸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배를 지키던 왜적 중에 죽음을 면한 자는 옥천으로 도망가서 상륙했던 적과 합세하여 영동고을을 불살랐다.
장암진(長巖鎭)은 서천의 진포대첩승전지이다. 기벌포가 바로 장암진으로 알려져 있다. 모래찜질의 풍속은 언제부턴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고려 때 포영이었던 장암진이 유배지였을 때 유배 온 선비들이 시간을 보냈던 장소로 구전되고 있다. 천혜의 요새, 기벌포와 탄현기벌포는 지금의 충남 장항읍 장암리에 있는 장암진 성터 서남쪽의 큰 돌산을가리킨다. “우왕6년(1380년)8월 왜적의 배 500척이 鎭浦口에 들어와서 굵은 밧줄로 서로 얽어 매여 놓고 일부 병력으로 그것을 수비하면서 드디어 상륙한 후 분산하여 각 州,郡에 들어가서 방화 약탈하였다. 이때 나세 장군과 심덕부 등이 진포에 이르러 화포로 그 선박을 불 지르니 배를 지키던 적들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서 거의 전멸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배를 지키던 왜적 중에 죽음을 면한 자는 옥천으로 도망가서 상륙했던 적과 합세하여 영동고을을 불살랐다. 이와 같이 당시의 전투상황은 왜 선단이 부두에 정박하고 밧줄로 서로 얽어 매인 상태로 고려군의 선단이 공격할 때 전투대형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적은 수의 고려군의 선단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암진은 지형적으로도 배가 정박하기에 최적지이다 오늘날 물양장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소였다. 바다의 파도를 막아 주고 적으로부터 노출되지 않도록 은폐 할 수 있는 천혜의 군사적 지형이 바로 장암진이다. 조선시대 장암진의 고지도 해동지도를 보면 이곳을 船泊處(선박처) 즉 배대는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를 증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장암진은 고려 조정이 왜구에 대비해서 금강유역에 축조한 최초의 城이였다. 장암이라는 지명이 왜구와 관련된 기록이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고려 공민왕 원년(1352년)3월에 장암에서 왜적과 싸워 적선1척을 노획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장암진이 왜구에 대한 방어기지로서 주목받게 된 것은 공민왕12년(1363년) 3월 판밀직사 李珣(이순)을 양광도(충청도) 도순문사를 삼아 장암에 나아가 지키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조운과 관련하여 중종3년(1508년)에 금강하구부에 군산창과 성당창을 설치하여 전라도의 함영, 전주 등 19개 郡.縣의 세곡을 수납하게 됨에 따라 중종9년(1514년) 장암진성인 舒川浦營(서천포영)은 석성으로 다시 축조하여 水軍鎭營으로 운영되었다. 진포대첩승전지의 포구는 일제가 장항제련소를 건립하면서 長巖鎭城의 석축을 허물어 진포구의 입구를 축조매립 육지와 시키면서 농토로 활용하였다. 진포대첩승전지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현재 정부대안사업으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해양생물자원관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분류:장암 분류:서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