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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읍(洛邑) 또는 정읍은 낙양(洛陽)의 서쪽 교외에 있던 고대 도시이다. 원래 주나라의 수도는 호경(鎬京)이었는데, 무왕이 상나라(商)를 멸망시키고 나서 구정(九鼎)을 낙읍에 옮겼다. 주나라(BC 12세기말) 초기에 낙읍(洛邑:낙양의 옛 이름)은 오늘날의 서시 근처에 왕들의 주거지로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기원전 771년에 주나라의 수도가 되었고, 그후 오늘날의 동시의 북동쪽으로 이전했다. 이 도시가 낙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낙수[洛水] 북쪽(중국어로 '陽'은 북쪽을 뜻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정나라는 주 왕실이 낙읍으로 옮기게 되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 가장 큰 혜택을 입은 나라였다. 정나라는 태사 백의 권고에 따라 봉지를 낙읍 근처로 옮겼다. 동쪽 영토와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주공의 치밀한 계산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다. 정나라는 내부적으로 낙읍 주변의 천하의 요충지인 신정과 경성, 제읍 주변의 땅을 안정적으로 보유하면서 물적인 토대를 탄탄히 구축하였다. 춘추전국시대(동주) (기원전 700년경 - 기원전 200년경) 주나라가 이민족의 침입으로 호경이 함락 당하고 낙읍(낙양)으로 옮기면서 춘추 시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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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읍(洛邑) 또는 정읍은 낙양(洛陽)의 서쪽 교외에 있던 고대 도시이다. 원래 주나라의 수도는 호경(鎬京)이었는데, 무왕이 상나라(商)를 멸망시키고 나서 구정(九鼎)을 낙읍에 옮겼다. 주나라(BC 12세기말) 초기에 낙읍(洛邑:낙양의 옛 이름)은 오늘날의 서시 근처에 왕들의 주거지로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기원전 771년에 주나라의 수도가 되었고, 그후 오늘날의 동시의 북동쪽으로 이전했다. 이 도시가 낙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낙수[洛水] 북쪽(중국어로 '陽'은 북쪽을 뜻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정나라는 주 왕실이 낙읍으로 옮기게 되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 가장 큰 혜택을 입은 나라였다. 정나라는 태사 백의 권고에 따라 봉지를 낙읍 근처로 옮겼다. 동쪽 영토와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주공의 치밀한 계산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다. 정나라는 내부적으로 낙읍 주변의 천하의 요충지인 신정과 경성, 제읍 주변의 땅을 안정적으로 보유하면서 물적인 토대를 탄탄히 구축하였다. 동방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아 낙읍에 영을 건설하는 책무를 띄었다. 낙읍 건설 후 성왕은 친히 낙읍에 가서 천하 제후와 사이(四夷)의 수장들과 대회합을 가졌다. 춘추전국시대(동주) (기원전 700년경 - 기원전 200년경) 주나라가 이민족의 침입으로 호경이 함락 당하고 낙읍(낙양)으로 옮기면서 춘추 시대가 시작된다. 남궁경숙이라는 사람이 노나라 임금에게 청해 임금의 후원으로 공자는 남궁경숙과 주나라 서울인 낙읍에 가서 문물을 배웠다. 낙읍 방문을 마치고 다시 노나라에 돌아온 공자는 그 명망이 더욱 높아져 사방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한대(漢代:BC 206~AD 220)의 시가지는 대체로 옛 낙읍의 자리에 있었지만 낙양이라고 불렸다. 낙양은 후한(後漢) 초기인 1세기에 이르러서야 국도(國都)가 되었지만, 이 도시의 경제적 중요성은 그 전부터 인정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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